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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8-21 15:02:51
  • 수정 2023-08-21 15: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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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초(史楚) 노석영(1875~1945).


※ 2022년 기자가 쓴 ‘노사초(盧史楚)의 생애’를 수정 보완하여 다시 싣습니다.


1975년생 이창호보다 꼭 100년 앞섰다. 1875년 경남 함양군에서 태어났고 광복을 맞은 1945년 생을 마감했다. 노사초(盧史楚)의 본명은 석영이며 사초는 호. 


대일항쟁기는 순장바둑시대였다. 순장바둑은 흑백 8개씩 도합 16개의 돌을 기본 치석으로 삼은 후 개시하는 순수 우리의 바둑이다. 당연히 포석은 생략되었고 필연적으로 수읽기에 바탕을 둔 전투력으로 승부했다. 한국바둑이 실전적인 힘 바둑인 이유는 이러한 순장바둑 DNA가 남아 있기 때문일 터. 


노사초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다. 30세가 지나서야 바둑에 일로매진하여 국수(國手)에 이르게 된다. 청년기에 당대 일인자 백남규(白南圭)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바둑과 본격적인 인연을 쌓았다. 처음 백남규에게 사사할 때는 여섯 점 바둑이었으나 몇 해 지나지 않아 곧 맞수가 된다. 


노사초도 당연히 전투형이며 큰 기술을 구사하는 큰 바둑이었다. 특히 하수 다루는 명수였다. 윤경문(尹敬文)에게 노사초가 정선으로 들어갔을 시절, 윤경문은 같은 하수를 다섯 점을 접는데 노사초는 여섯 점을 접고도 이겼다고 한다. 


함양 노사초는 대구 채극문(蔡極文) 고령 윤경문(尹敬文)과 함께 영남삼걸(嶺南三傑)로 불렸다. 


▲ 경남 함양 개평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앞산에 2008년 노사초공원을 조성해 노사초사적비를 세웠고, 그해 노사초배가 탄생하게 된다.


1937년 제1회 전조선위기(圍碁)선수권대회에서 노사초는 7승2패의 성적으로 우승한다. 당시 참가 선수는 노사초를 위시하여 채극문 민중식 정규춘 윤주병 권병욱 유진하 이석홍 장규황 권재형 등 내로라하는 조선의 국수 10걸이었다. 


특히 20년 연하였던 유진하 이석홍은 노사초의 제자들이었으며, 당시 62세로 이미 정점에서 한참 지난 시기였음에도 노사초의 기재는 주머니 속 송곳이었다.


노사초는 과감한 사석작전에 능통했고 바꿔치기를 이용한 형세판단이 탁월한 고수였다. 바꿔치기에는 패싸움이 의당 따라붙는 법이며, 패싸움을 능수능란하게 해냈다는 뜻에서 ‘노패(盧覇)’, ‘노상패(盧上覇)’로 불렸다. 


바꿔치기, 패싸움, 형세판단은 우칭위엔(吳淸原)의 특장점이기도 한데, 역시 동서고금의 고수들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판단이 우월한 법인가보다.


노사초가 순장바둑의 대가라고 해서 현대바둑에는 문외한일 거라는 오해는 거두어야 한다. 노사초가 활약하던 시기는 근대와 현대의 경계였다. 노사초는 시대의 흐름을 깨닫고 일본에서 들어온 현대바둑을 오히려 앞장서서 받아들인 인물이다. 


앞서 제1회 전조선위기선수권이 있었던 1937년 말 한국기원의 전신 경성기원에서는 전래의 순장바둑 폐지를 결의하고 일본바둑을 공식 채택한 원년이기도 했다. 노사초를 위시한 노(老)국수들도 시대의 흐름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앞다투어 새로운 바둑에 적응할 준비를 했다. 결국 바둑은 같은 것이니까.


▲ 노사초(흑)-권병욱 대국기보. 1939년 12월, 경성(京城). 121수 이하 줄임, 흑 불계승.


1934년 중국방문을 마치고 조선에 들른 기타니미노루(木谷實)를 만나기 위해 조선의 고수들이 문전성시였다. 당시 여자프로 혼다가즈코(本田壽子)와 맞붙은 노사초는 조선의 대표로서 혼다에게 백을 들고 일본식 바둑으로 만방으로 이겼다. 프로가 없던 시절 '촌로 노사초'가 세련된 일본 프로를 향해 거둔 쾌거였다. 


노사초는 기다니로부터 당장 일본을 가더라도 3단 실력을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천재 우칭위엔(吳淸源)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받은 단위가 3단이다. 


노사초는 약관의 나이로 진사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마당에 더 이상의 대과출사(大科出使)를 포기함으로써 전도유망한 벼슬길을 접는다. 대신 바둑을 벗 삼아 전국을 유랑하며 인생의 낙을 삼게 된다. 


해산한 며느리의 약을 구하러 나섰다가 그길로 한양으로 내기바둑 길을 나서는 등 방랑기질이 다분했다.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며 내기바둑에 심취하여 지금 돈으로 20억쯤 되는 기와집 15채를 날렸고 20채를 되찾아왔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지금도 회자된다. 덕분에 자택 등기도 27번이나 바뀌었다고. 


부잣집에 태어난 노사초의 성품은 온화하고 검소하고 물욕이 없었고 항상 주변에 베풀기를 좋아했다.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자신의 옷과 바꿔 입기도 했다. 


집안은 증조부 노광두(盧光斗)가 호조참판을 지냈을 정도로 명망 가문이었다. 노광두는 흉년이 든 해엔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하게 해주도록 상소를 올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었다. 


참고로 함양 개평리 소재 ‘노사초 생가’로 알려진 문화재 자료 360호 ‘노참판댁 고가’는 풍천 노씨 가문의 노석규(盧錫奎)가 개평마을로 이주하였을 때에 지은 것으로, 노석규는 노광두의 부친이다.


당연히 노사초에게도 함양선비의 강직함은 있었다. 선친의 가산을 정리하여 10만 냥을 국난극복자금으로 헌납하기도 했으니. 요즘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가문이었다.  


▲ 노사초의 장손 노철환 씨 내외가 노사초 생가에 기거하고 있다.


노사초는 하수와도 격의 없이 잘 어울렸고, 내기로 딴 돈을 가난한 지인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일찍이 스승 백남규가 개성 박정현(朴正鉉)에게 내기바둑으로 큰돈을 잃자 박정현을 찾아가 바둑으로 잃었던 돈을 바둑으로 찾아주기도 했던 그였다.


노사초 정신은 청심과욕(淸心寡慾)이다. 바둑 잘 두는 비결은 늘 깨끗한 맘으로부터 출발하며 맘이 깨끗하지 못하면 최선의 수를 찾지 못한다고 갈파했다. 위기십결(圍棋十訣) 가운데 부득탐승(不得貪勝)와 흡사한 덕목이라고 하겠다. 


말년에 후배 국수였던 유진하(柳鎭河)가 “사초선생께서는 타개하시면 바둑을 두고 싶어서 어찌하렵니까?” 묻자, “천국은 기선(棋仙)이 있는 곳. 어찌 그런 걱정을 하겠는가. 훗날 사람들이 나를 묻거든 일러주게. 固一世之善棋더니 而今安在哉야(진실로 한 시대의 잘 두는 바둑이더니 지금은 어디로 갔느냐)라고 말일세.”라며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구절을 자주 인용했다고 한다. 


1945년 봄 노사초배 타계했을 때, 그 구절을 만장(挽章)으로 크게 써서 상여 뒤에 걸었다고 한다.


불세출의 천재기사 이창호도 스승 조훈현을 만나기에 가능했고, 천하의 조훈현도 근대바둑의 개척자 조남철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조남철의 그 위대함도 구한말 노국수(老國手)로부터 잉태되었음에, 노국수의 최고봉 노사초(盧史楚)는 가히 한국바둑 현대와 근대의 가교였다.


경남 함양군은 노사초 선생의 이 같은 바둑계에 끼친 큰 공로를 기려서 생가가 있는 지곡면 개평마을에 2008년 8월 기념비와 정자를 세웠으며 선생의 생가 ‘노참판댁’은 경남 문화제 사료 제360호로 지정되었다. (끝)



▲ 이번 주말 경남 함양 고운체육관과 자곡면체육관에서 600여 기객들이 참가한 가운데 노사초배가 성대하기 치러진다. 사진은 지난대회 모습.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떨리는 그 이름 노사초(盧史楚).

이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대가 최강이라면, 그대가 최강이 되고 싶다면 노사초배를 놓쳐서는 아나된다. 


전국의 수많은 대회 중 최고의 선수들이 겨루는 최고의 노사초배는 각 부문 최강의 선수들만 출전을 결심한다. 21일 오전12시 현재 ‘사초’ 노석영을 만나기 위해 정예 남녀노소 선수 200명이 출전신청을 했다.  (기사 하단에 참가자신청자 명단 있음)


공식 참가 접수 기간은 지난 주말로 끝이 났다. 그러나 각 부문 약간 명은 추가로 신청을 받아줄 수도 있다고 하니, 머뭇거리는 분들은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제16회 노사초배 참가신청 명단(무순)


■ 아마국수부(76명)

최준민 한주영 노상호 하주완 김정선 안병모 김정훈 백시봉 조민수 김근태 정찬호 홍준선 이준수 박종욱 김도엽 송민혁 이화섭 박정헌 염지웅 김동한 류인수 정우진 박지웅 김현우 김대혁 안상범 문국현 백운기 심해솔 최혁순 이은수 조성호 이웅희 장우진 김근영 박재동 홍근영 박정웅 이주영 오경래 박승현 김신유 온승훈 양종찬 서윤서 윤주원 유수환 강경현 황환희 정재민 이신우 변정민 심성민 김현석 곽동규 임지혁 김하윤 최찬규 정시우 박중훈 신동목 조성빈 유신성 윤서율 박시하 박종찬 신유민 김상우 김기원 김태겸 김혁준 김정환 김담 임경호 김태세 양동일


■ 시니어국수부(35명)

이성재 노근수 윤석철 이학용 하성봉 임성환 이철주 표정윤 서부길 최호철 채영석 장부상 이방직 윤윤석 신홍섭 최계성 장시영 동대완 이용만 김희중 권병훈 양창연 곽웅구 이용희 김준상 한상복 조민수 안재성 최진복 원동일 김형섭 조종철 주준유 허제헌 김종률


■ 여성국수부(34명)

이우주 장윤정 이서영 채현기 조경진 한유정 권이슬 권가양 윤주혜 정지우 한지원 최민서 이남경 장민희 조시연 정하음 백여정 장진아 이정은 이나현 악지우 임지우 박예원 김지현 나세희 장혜민 배정윤 김지수 김수아 최서비 송유진 김이슬 조은진 서수경 정지율


■ 학생최강부(24명)

김태우 장시원 류승하 이주환 박현성 심윤재 박해든 정승영 서지산 임지호 최경서 유리우 박승후 김현우 이승석 고유준 김기원 오경민 장재우 신정훈 김도윤 하미르 김민조 백결 윤현성 오현정


■ 초등최강부(34명)

오세현 임준 서예찬 김준원 이시우 육하진 김라온 육하빈 박대호 신세민 송재훈 강유원 추정우 김단우 김민건 박선우 박태준 김태윤 김예찬 안도현 전준영 최강우 전승혁 박정빈 이승훈 정태민 문지환 정인 이용준 한정훈 박서헌 김지후 박경규 허태웅




※ 이 기사는 현장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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