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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12-02 12:00:25
  • 수정 2021-12-02 12:3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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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초(史楚) 노석영(1875~1945).


※ 2019년 8월23일 기자가 쓴 ‘노사초(盧史楚)의 생애’를 수정 보완하여 싣습니다. 


1975년생 이창호보다 꼭 100년 앞섰다. 1875년 경남 함양군에서 태어났고 광복을 맞은 1945년 생을 마감했다. 노사초(盧史楚)의 본명은 석영이며 사초는 아호. 


대일항쟁기였던 그때는 순장바둑시대였다. 순장바둑은 흑백 각기 8개씩 도합 16개의 돌을 기본 치석으로 삼은 후 바둑을 시작한다. 당연히 포석단계는 없었고 필연적으로 수읽기에 바탕한 전투력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바둑이 실전적인 힘 바둑인 이유는 이러한 순장바둑 DNA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일 터.


노사초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다. 청년기에 당대 일인자 백남규(白南圭)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바둑과 본격적인 인연을 쌓았고, 30세가 지나서야 바둑에 일로매진하여 국수(國手)가 된다. 


노사초도 당연히 전투형이며 큰 기술을 구사하는 큰 바둑이었다. 처음 백남규에게 사사할 때는 여섯 점 바둑이었으나 몇 해 지나지 않아 곧 맞수가 된다.


특히 노사초는 하수 다루는데 명수였다. 고령의 윤경문 국수에게 노사초가 정선으로 들어갔을 시절, 윤경문은 같은 하수를 다섯 점을 접는데 노사초는 여섯 점을 접고도 이겼다고 전한다. 함양 노사초는 대구 채극문(蔡極文) 고령 윤경문(尹敬文)과 함께 영남삼걸(嶺南三傑)로 불렸다. 


지금으로 치면 바둑의 국가대표를 뽑는 자리였을 1937년 제1회 전조선위기(圍碁)선수권대회에서 노사초는 7승2패의 성적으로 우승한다. 당시 참가 선수는 노사초를 위시하여 채극문 민중식 정규춘 윤주병 권병욱 유진하 이석홍 장규황 권재형 등 내로라하는 조선의 국수 10걸이었다. 특히 20년 연하였던 유진하 이석홍은 노사초의 제자들이었으며, 당시 62세로 이미 정점에서 한참 지난 시기였음에도 노사초의 기재는 주머니 속 송곳이었다.


▲ 경남 함양 개평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앞산에 2008년 노사초공원을 조성해 노사초사적비를 세웠고, 그해 노사초배가 탄생하게 된다.



노사초는 과감한 사석작전에 능통했고 바꿔치기를 이용한 형세판단이 탁월한 고수였다. 바꿔치기에는 패싸움이 의당 따라붙는 법이며, 패싸움을 능수능란하게 해냈다는 뜻에서 ‘노패(盧覇)’, ‘노상패(盧上覇)’로 불렸다. ‘노상’은 ‘늘’, ‘항상’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


바꿔치기, 패싸움, 형세판단은 우칭위엔(吳淸原)의 특장점이기도 한데, 역시 동서고금의 고수들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판단이 우월한 법이다. 


노사초가 순장바둑의 대가라고 해서 현대바둑의 문외한일 거라는 오해는 거두어야 한다. 노사초가 활약하던 시기는 근대와 현대의 경계였음에도, 노사초는 시대의 흐름을 깨닫고 일본에서 들어온 현대바둑을 앞장서서 받아들인 인물이다. 


앞서 제1회 전조선위기선수권이 있었던 1937년 말 한국기원의 전신 경성기원에서는 전래의 순장바둑 폐지를 결의하고 일본바둑을 공식 채택한 원년이기도 했다. 노사초를 위시한 '기득권자' 노(老)국수들은 시대의 흐름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새로운 바둑에 적응할 준비를 했다. 결국 바둑은 같은 것이니까.


▲ 노사초(흑)-권병욱 대국기보. 1939년 12월, 경성(京城). 121수 이하 줄임, 흑 불계승.



1934년 중국방문을 마치고 조선에 들른 기타니미노루(木谷實)를 만나기 위해 조선의 고수들이 문전성시였다. 당시 여자프로 혼다가즈코(本田壽子)와 맞붙은 노사초는 조선의 대표로서 혼다에게 백을 들고 일본식 바둑으로 만방으로 이겼다. 프로가 없던 시절 '촌로 노사초'가 세련된 일본 프로를 향해 거둔 쾌거였다. 


노사초는 기다니로부터 당장 일본을 가더라도 3단 실력을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천재 우칭위엔(吳淸源)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받은 단위가 3단. 


둘째 아들이 일본유학 중 결혼을 하게 되어 한 달간 일본여행을 다녀온 노사초는 일본에서 대활약 중이던 천재소년 우칭위엔 만나보고서 “이슬만 먹었는지 기린처럼 미끈하고 맑아서 물욕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인물평을 남기기도.


▲ 노사초 생가를 지키는 노사초 국수의 맏며느리 이정호(당시 92세, 2016년 작고) 여사와 손녀 노말해 씨. 공교롭게 기자가 찍은 이 사진이 이여사의 마지막 생전 모습으로 남았다. 


노사초는 약관의 나이로 진사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마당에 더 이상의 대과출사(大科出使)를 포기함으로써 전도유망한 벼슬길을 접는다. 대신 바둑을 벗 삼아 전국을 유랑하며 인생의 낙을 삼게 된다. 


해산한 며느리의 약을 구하러 나섰다가 한양으로 내기바둑 길을 나서는 등 방랑기질이 다분했다.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며 내기바둑에 심취하여 지금 돈으로 20억쯤 되는 기와집 15채를 날렸고 20채를 되찾아왔다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덕분에 자택 등기도 스무 일곱 차례나 바뀌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부잣집에 태어난 노사초의 성품은 온화하고 검소하고 물욕이 없었고 항상 주변에 베풀기를 좋아했다.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자신의 옷과 바꿔 입기도 했다. 


집안은 증조부 노광두가 호조참판을 지냈을 정도로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노광두는 흉년이 든 해엔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하게 해주도록 상소를 올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노사초에게도 함양선비의 강직함은 있었다. 선친의 가산을 정리하여 10만 냥을 국난극복자금으로 헌납하기도 했으니. 요즘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가문이었다.  


노사초는 하수와도 격의 없이 잘 어울렸고, 내기로 딴 돈을 가난한 지인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일찍이 스승 백남규가 개성 박정현에게 내기바둑으로 큰돈을 잃자 박정현을 찾아가 바둑으로 잃었던 돈을 바둑으로 찾아주기도 했던 그였다.


▲ 이여사의 별세 후 노사초의 장손 노철환 씨 내외가 이곳에 기거한다.


노사초 정신은 청심과욕(淸心寡慾)이다. 바둑 잘 두는 비결은 늘 깨끗한 맘으로부터 출발하며 맘이 깨끗하지 못하면 최선의 수를 찾지 못한다고 갈파했다. 위기십결(圍棋十訣) 가운데 부득탐승(不得貪勝)와 흡사한 덕목이라고 하겠다. 


말년에 후배 국수였던 유진하가 “사초선생께서는 타개하시면 바둑을 두고 싶어서 어찌하렵니까?” 묻자, “천국에는 기선(棋仙)이 있는 곳. 어찌 그런 걱정을 하겠는가. 훗날 사람들이 나를 묻거든 일러주게. 固一世之善棋더니 而今安在哉야(진실로 한 시대의 잘 두는 바둑이더니 지금은 어디로 갔느냐)라고 말일세.”라고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구절을 자주 인용했다고 한다. 


1945년 봄 노사초배 타계했을 때, 그 구절을 만장(挽章)으로 크게 써서 상여 뒤에 걸었다고 한다.


불세출의 천재기사 이창호도 스승 조훈현을 만나기에 가능했고, 천하의 조훈현도 근대바둑의 개척자 조남철이 있었기에 존재했다. 조남철의 그 위대함도 구한말 노국수(老國手)로부터 잉태되었음에, 노국수의 최고봉 노사초(盧史楚)는 가히 한국바둑 현대와 근대의 가교였다.


경남 함양군은 노사초 선생의 이 같은 바둑계에 끼친 큰 공로를 기려서 생가가 있는 지곡면 개평마을에 2008년 8월 기념비와 정자를 세웠으며 선생의 생가 ‘노참판댁’은 경남 문화제 사료 제360호로 지정되었다. 


활짝 갠 12월4일-. 

100년 전 노사초(盧史楚)를 만나러 400여 노사초의 후예들이 함양으로 집결한다.


※ 기사 말미에 출전자 명단 업데이트 있음


▲ 이번 주말 경남 함양 고운체육관과 자곡면체육관에서 400여 기객들이 참가한 가운데 노사초배가 성대하기 치러진다. 사진은 지난대회 모습.









제14회 노사초배 각 부 출전 명단 업데이트


오픈최강부

신윤호 조남균 김효영 최홍윤 박신영 이재성 차주혜 박정수 강우혁 홍무진 박현수 정우진 김누리 강훈 현유빈 강지훈 임상규 원제훈 강병권 김민서 김범서 김유찬 김지명 박대영 박동주 박병규 백찬희 양민석 이승준 이호범 임진욱 장은빈 정훈현 주치홍 최민서 최원용 한우진 김상천 강훈(프로 39명)

조종신 김동한 정찬호 홍명세 장이준 김사우 김용완 김지성 송민혁 김승구 강재우 최윤상 박중훈 홍세영 최정관 김주형 박청호 김윤태 조성호 기민찬 최환영 김정현 김누리 서문형원 한형석 최원진 김다빈 배찬진 임지혁 임경찬 감가온 윤서원 정준우 윤진서 신유민 김대의 김상우 이길재 조성빈 신동현 김기언 임의현 이승민 김근태 김태우 류인수 서준우 김지태 김여연 양종찬 윤서율 안상범 홍준선 조성재 강유승(아마 51명)


아마최강부

문국현 박지훈 장명훈 전진수 이화섭 심해솔 김대혁 김장수 이준수 박태영 염지웅 이준우 김정선 서지산 성준호 윤남기 안영우 박재동 채민혁 강지훈 조민수 이상혁 김근영 김하윤 박승현 김상원 안병모 이상빈 이린근 송형찬 한주영 조상연 서호진 김승원 이건우 남서현 김진우 김신유 박정헌 김상현 윤주원 강경현 홍승우 정재민 강현재 심성민 홍윤도 온승훈 엄동건 김정훈 김민석 오경래 김태우 김건 신현석 박종욱 박수창 김태헌 임현수 이주영 박지수 최준민(60명)


시니어+여성최강부

이용만 양세모 이루비 윤명수 이성재 한지원 양창연 권병훈 이서영 한유정 이정은 이나현 박용제 고미소 김희수 양덕주 악지우 최진복 백여정 이우주 윤라은 최민서 이주행 서수경 안재성 김지현 김지수 김수아 박송현 황이근 권가양 박예원 김민주 조경진 이선아 조은진 노상호 노근수 장시영 김동섭 서부길 김종민 윤태수 최계성 정근택 허제헌 박가영 조민수 조시연 고윤서 이나경 차문희 최호철 전유진 장혁구(54명)


여성단체부(10팀)

뭉쳐야둔다=박선희 박현옥 김연희 임영임 구영미

팔공=고이순 박경미 이승현 임은정 한미애    

비슬=김주희 남경정 서현숙 채경희 채성숙    

철쭉동산=김순득 김윤숙 양은숙 김분남 황은영    

철쭉동산=김귀란 정희복 신종숙 정수진 김윤경    

한벽루=김영순 김덕경 공석례 김강미 송윤숙    

오목대=신유경 배지원 이화영 김소향 유옥선    

금목서=안혜숙 문옥자 윤미자 이영화 김숙경    

들꽃사랑=김현 장혜민 박미자 김효정 이윤경    

광주지부=김영자 박병희 김숙향 김현숙 김순덕    


동호인최강부(9팀)

도기회=박성빈 김만수 권중덕 정세진 박광훈    

전북대1팀=박의환 홍경탁 우순만 권대현 황윤택

전북대2팀=정성환 조형구 홍영표 장성국 권재구

본인방가=김혁준 장부상 이석희 최병규 신홍섭    

한돌=박휘재 김재구 주준유 고성원 주우주    

원만회A=김정환 김순중 김철남 김만연 강종화    

원만회B=유정용 한칠성 전동규 조인성 안현택    

청담회=강성훈 임찬 강재열 김건태 이경재    

푸른돌=채영석 이재철 조병철 김동수 심의현    


시군단체부(11팀)

남원=송한성 양근주 조규홍 오효섭 유영민

장성=김하식 김을태 박성모 오배령 김경원

진주A=강철진노경헌 임채홍 정성은 천영식

진주B=유철종 오성호 강수일 조영하 최재규 김성일

창녕=하순개 박광호 한성기 조강욱 이용무 노창재

함안=이윤철 이권도 조상융 전민훈 안수열

김해=정승일 박지홍 한재홍 서동훈 송남구

고성=전현갑 김달겸 유재천 김정곤 노정철 김현재 강선호

부산=정일범 송기출 권순익 송준민 정형락

산청=윤경복 안천원 김동빈 임원장 조승섭

함양=김행일 이감성 전용식 강동환 김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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