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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3-16 11:38:44
  • 수정 2018-03-16 18: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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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입단대회 본선에서 대국에 열중하는 도은교.

 

흔히 인생을 '길'에 비유한다. 수많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 연속으로 결정하는 것이 삶이다. 시인 프로스트는 〈가지 않는 길〉말미에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고”라고 읊었다. 서른 셋 도은교에게는 ‘가야만 했던 길’이 또 있었다.

 

수많은 대소의 대회를 보아왔지만 영재입단이든 여자입단이든 일반인입단이든 연구생입단이든, 입단대회처럼 짜릿짜릿한 진검승부요 대하드라마는 여태 보지 못했다. 설혹 조훈현이든 이창호든 그 어떤 프로에게서도 실패 없이 손쉽게 입단에 성공했다는 얘길 들은 적도 없다. 출전자 모두가 장시간 끝까지 사력을 다하는 시합이기 때문이리라.

 

10세에 바둑에 입문하여 12세에 전국여자바둑대회를 우승했다. 연구생에 들어서도 승승장구하며 연구생 2조까지 올랐다. 누가 봐도 그녀의 앞길은 탄탄대로였을 때, 그녀는 만화처럼 소설처럼 홀연히 바둑을 떠났다.

 

명문대를 나오고 대기업에 입사를 하고… 버둑 이외에는 가지 않었던 길이었지만 성공작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명약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소녀시절 가졌던 꿈은 서른이 되어도 완전 소멸하지 않고 맘 한 구석에 체불된 빚으로 남아있었다. 바둑이었다. 다시 꿈틀거렸다. 그로부터 각고의 3년이 흐른 뒤 그녀는 마침내 꿈을 이뤘다.

 

핑크빛 레인코드가 퍽 어울리는, 봄비가 소록소록 내리던 목요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입단 새내기 겸 늦깎이 도은교(33)를 만났다.

 

▲ 도은교

 

“이제 실감나요. 어제 입단면장을 받았거든요.”

 

입단을 하게 되면 막 울 것 같다더니 아직 울었다는 얘기는 들은 바 없다. 원래 울음이 많을 것도 같다. 이세돌이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천금의 1승을 거둘 때 생방송 도중 눈물을 보였던 그녀였기에 하는 말이다.

 

“마지막 판이 끝날 때 (김)제나가 울었어요. 제나는 제가 아끼는 연구생 동생이거든요. 우리 둘이 4강에 1위로 올라와서 ‘잘하면 서로 안 만나겠다.’싶었는데, 막상 막바지에 서로 불의의 일격을 맞아서 결국 둘 중 하나가 떨어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입단대회가 시작되기 전 기자는 각 도장 원장과 사범들에게 ‘누가 유력한 후보냐’고 물었다. 불행히도 도은교를 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말을 도은교에게 전해주었다. “연구생 중에 김은지 이도현도 잘하고 이단비 전유진 등은 아무래도 저보다는 네임벨류가 있다고 봐야지요. 그 중 이단비 이도현은 입단했고, 제가 돌연변이죠.”

 

33세면 여자 최고령 입단이다. 향후 이런 ‘대기록’이 또 나올 것 같지는 않다. 한계극복이요 인간승리라는 뜻이다.

 

바둑 이력을 간단히 말해 달라고 하자 세월의 위력 때문인지 잘 생각이 안 난다고 한다. 하기야 벌써 20년이다. 어린 시절 활약상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기자와 함께 2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재구성해야 했다.

 

“초등3학년인 10살 때 동네 바둑교실에서 단수부터 배워서 아마4단 정도 되었을 때 양천도장에 갔어요. 그때가 5학년이었는데 이미 박영훈 박지은 이다혜 이민진도 있었어요. 그 뒤 도장이 문을 닫으면서 김성래 사범이 운영했던 푸른돌 기원으로 옮겼죠. 그곳에서 초등6학년 때 대한생명배 세계아마대회도 우승했고 여류아마국수전도 우승했어요. 중학교 때는 허장회 도장을 다녔어요. 그리고 3년 전 바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충암도장과 양천대일도장을 다녔고 한종진 도장에서 3개월 전에 입단했습니다. 도장은 안 다닌 데가 없을 정도네요.(웃음)”

 

▲ 대한생명배 세계여자아마바둑대회 우승 기념사진. 왼쪽부터 도은교의 부친 도봉락 씨, 김성래, 도은교, 윤기현(은퇴), 권갑룡.

 

도은교는 10대에 일곱 번, 30대에 일곱 번. 도합 14회 입단대회를 참가했다. 입단대회 중 기억에 남는 대회를 물었다. “저도 잡지를 뒤지면서 기억을 되살려보는데, 1997년 봄에 (조)혜연이가 입단했을 거예요. 그해 입단대회에서 2위를 했는데, 어릴 때는 어릴 때였나 봐요. 2위면 아깝게 프로가 못된 건데 기억이 없네요.(웃음) 그 후로 중3 때까지 매번 입단 0순위였죠.(웃음)”

 

도은교는 지금으로 치자면 바둑영재였다. 연구생 2조까지 다다랐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당시는 남녀연구생이 같은 풀에서 리그를 벌였기 때문에 여자 선수가 2조까지 다다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나중 세계를 제패하는 박지은이 연구생 1조에 오른 적이 있는데 그 다음으로 높은 위치였다. 따라서 시간이 문제일 뿐 그녀의 입단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입단은 계속 늦춰졌다. 1999년 중2 때 도은교는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였던 부모님들의 이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처음으로 갈등을 겪는다. 바둑고수인 아빠는 당연히 계속 바둑을 시키자는 쪽이었고, 엄마는 공부로 돌리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아이를 바둑으로 잡아두는 게 못 마땅했다.

 

사실 당시 여자입단대회는 1명만 뽑았을 때였으니 아무리 뛰어난 자질이라고 해도 천운이 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마지막 중3 입단대회를 또 실패하자 도은교도 더 이상 바둑을 고집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뜻을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 2018 입단면장수여식. 왼쪽부터 윤현빈, 도은교, 이단비, 이도현.

 

순순히 학업으로 돌아가게 된 데는 아빠의 사업실패도 한몫을 했다. 주식투자를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바둑도장을 계속 다니기엔 월사금이 부담스러웠다. 딴 맘을 먹을 수가 없었다. 완전히 공부로 전향했다. “바둑 잘 두는 아이가 공부도 잘한다고 하지만, 전 그때까지 학교 공부는 전혀 뒷전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바둑을 포기한 것도, 공부로 전향한 것도 도박이었죠.”

 

도은교가 결국 명문대를 갈 수 있었던 건 중3 때부터 시작된 엄마의 엄격한 관리 덕이다. 기우는 가세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엄마는 악착같이 입시학원을 경영하면서 딸을 밀착 관리했다. 그러니까 중3 때 5월쯤엔 완전 바닥이던 도은교의 성적이 졸업할 때는 중상위 레벨에 들었다.

 

그렇다고 바둑에 대한 그리움마저 완전히 끊을 수는 없었다, 중3 때는 인터넷 바둑을 가끔 두었다. 그런데 이 마저도 고교에 들어가면서 완전 차단했다. 친구 이다혜를 통해서 가끔 바둑친구들 안부를 묻는 정도가 바둑과 관련있었다는 정도.

 

고교 3년 동안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애틋함에서는 각별했다. 역시 바람은 헛되지 않았고, 바둑 두는 기재들은 공부도 잘한다는 것은 또 한 번 증명했다.

 

 ▲ 연세대기우회 선배들과 압구정리그 회원들이 마련해준 도은교 입단 축하연에서 도은교가 입단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잘 나가는 증권사인 미래에셋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사하게 된다. 탄탄대로였다. 그즈음 바둑계 어디에서도 그녀의 이름이 회자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남들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하고 늦은 시간까지 일에 파묻혀 있는 동안 자아(自我)는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쳇바퀴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다시 바둑의 향내를 찾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돌이키면 바둑을 두던 어린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느꼈어요. 우연히 압구정리그에 참여하게 되었지요.”

 

이번엔 도은교가 집안의 불화를 만들었다. 잊혔던 바둑을 다시 두겠다고 선언하자 부모님과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번엔 바둑을 이해하는 아빠도 반대했다. 하기야 남들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대기업을 스스로 발로 차고 나온다는데, 그것도 네 뜻이니 맘대로 하라는 부모가 있을 리 만무하다.

 

“저는 한번 꽂히면 부모님도 말리지 못해요. 난리를 친 거죠. (어떻게 난리를?) 그 말씀을 드리면 제 이미지가 손상될 것 같아요(웃음). 남들이 부러워하는 가치에 대해 저는 비중을 안 두고 살아요.”

 

‘사람은 어린 시절의 꿈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불행해진다’던 교황 비오12세(PiusⅫ)가 갑자기 생각났다.

 

 ▲ 바둑TV에서 인기 캐스터로 활약한 도은교. 사진은 바둑캐스터끼리 '여신의 한수'라는 이벤트 대국 시상식 장면. 오른쪽은 이소용.

 

‘어, 쟤 누구야? (도)은교 아냐?’

어린 시절부터 도은교의 활약상을 익히 알고 있던 기자는 수년전 갑자기 그녀를 만났다. 사실 그녀가 바둑으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처음 1년은 바둑TV 진행자로서 화면에 나타난 것.

 

“멀쩡한 직장을 스스로 그만 두었으니 면피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바둑TV 진행을 맡았어요. 손을 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도은교는 편하고 감수성 짙은 진행자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바둑과 함께 보내는 하루하루는 지난 십수년간 느끼지 못했던 후련함이었지만, 그리 오래가질 못했다. 돌아온 이유가 TV출연하기 위함은 아니었음으로.

 

“점점 불안해지는 거예요. 입단대회를 나가보면 계속 죽을 쑤고, 여타 아마대회에 나가도 입상 한번 못했죠.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돌아갈 다리도 잘라버렸는데 말이죠(웃음).”

 

하루 왼 종일 도장에서 씨름하는 어린 기재들을 따라잡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멀쩡한 직장을 던져버리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호사하는 것처럼 바라보는 주변 시선도 괴로웠다. 다시 방송을 접고 훌쩍 대만으로 떠났다. 3개월 동안 흐트러진 맘을 다잡고 세속에 물든 때를 완전히 빼고자 했다.

 

▲ 도은교는 2017년 17년만에 다시 여자아마국수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채현지, 도은교 박지영 한유정.

 

입단할 수 있겠다는 필이 강하게 온 것은 작년이었다. 작년엔 아마강자 도은교에게 실로 일들이 일어났다. 어린 시절 우승 맛을 보았던 여자아마국수전에서 17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지지옥션배아마대항전에서 강타자 조민수를 꺾고 여자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바둑으로 돌아온 지난 2년간과는 완전 다른 변화에 자신도 놀랐다.

 

“그 전에는 실력적으로는 승부할 수 있음에도 자신감이 없었어요. 이길 수 있는 것과 실제로 이겨내는 것은 중요한 차이에요. 4승1패나 3승2패나 한 판 차이지만 그 한판으로 입단대회에서 본선진출과 예선탈락이 결정되거든요. 반드시 이겨야할 때 이길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죠. 제가 독해졌더라고요(웃음)”

 

제 아무리 굴곡 있는 과거도 이렇게 차 한 잔 마실 시간에 모조리 훑을 수 있다. 과거 얘기 중에 다시 오버랩되는 장면들이 떠올랐는지 도은교는 가끔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입단소식을 듣고 부모님이 서로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대요. 아빠가 더 울었대요.”

 

 

“남자친구 있나요?” 서른 셋 먹은 소녀가 걱정(?)되어서 물어보았다.
“전에 사귀었지만 딱 부러지는 제 성격에 맞지 않았어요. 전 굉장히 현실적이어서 사랑에 빠졌다가도 다시 빠져나왔죠(웃음).”

 

다시 여자국수전을 우승할 수 있을까? 이번엔 여자프로국수전인데. “제가 많이 늦었잖아요. 1~2년 더 바짝 열심히 해서 과연 어느 수준까지 가는지 저도 궁금해요. (진지하게) 최정과 해볼 만할 것 같아요.”

 

소녀는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의 끝자락에는 보물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열 걸음만 가면 무지개 끝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퍼뜩 한달음에 다가가면 희한하게도 아까 본 거리만큼 멀어져 있었다. 야릇한 생각이 든 소녀는 계속해서 홀린 듯 무지개를 잡으러 다녔다. 얼마나 그렇게 쫓아다녔을까. ‘이제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자’는 엄마의 귀가 독촉이 있자 비로소 소녀의 하루의 낙망은 끝이 난다. 그 소녀는 어린 시절의 무지개를 잊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서른 셋 소녀 도은교의 무지개 쫓아가기는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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