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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11-21 19:15:08
  • 수정 2017-11-21 19: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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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 8단이 21일 한국기원 국가대표실에서 포석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외모는 영락없이 앳된 소녀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의 생기발랄한 미소에선 승부사적인 기질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적어도 치열했던 수 많은 반상(盤上) 전투에서 내로라 한 상대들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낸 선수로 보이진 않았다. 21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만난 프로바둑기사 최정(21) 8단의 첫인상은 그랬다.


“글쎄요. 잘한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그에게 올해 자신에 대한 성적표를 묻자, 돌아온 답변은 의외로 인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 8단은 올해를 최고의 한 해로 장식했다. 지난 10일 중국 궁륭산병성배 세계여자바둑대회에서 개인전 우승을 거머쥔 그는 앞서 단체전으로 열렸던 황룡사 정단기배와 천태산 농상은행배, 명월산배 5도시 여자바둑쟁탈전에서도 모두 정상에 등극, 올해 열렸던 세계여자바둑대회를 싹쓸이했다.


특히 궁륭산병성배 우승은 위즈잉과 왕천싱, 리허 등 중국 랭킹 1~3위를 잇따라 격파하면서 가져온 값진 결과였다. 덕분에 지난 2013년12월에 오른 최 8단의 국내 여자 프로바둑기사 랭킹 1위 기록도 현재까지 철옹성처럼 굳어진 상태다.


“나중에 주변 사람들에게 듣고 나서야 궁륭산병성배 우승 의미를 알았어요. (경기를) 잘 마무리해서 다행입니다.” 겸손해 했지만 최 8단의 성과는 적지 않았다. 그 동안 열세였던 한ㆍ중 여자바둑 대결에서의 무게 중심을 궁륭산병성배 우승과 더불어 확실하게 한국 쪽으로 옮겨왔다는 평까지 받았다. 일본 바둑이 한국과 중국에 비해 열세인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가 세계 여자 바둑계의 주도권을 가져온 셈이다.


명실공히 세계 여자 바둑계 1인자로 올라섰지만 사실 최 8단의 바둑 입문은 우연하게 시작됐다. 노후에 함께 할 취미를 찾았던 부친이 7살배기 딸을 바둑학원에 보냈는데, 이 곳에서 숨겨졌던 최 8단의 바둑 재능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집중력이 좋고 수읽기 능력이 뛰어나다.


단순히 취미로 즐기기엔 아까운 기량이다”는 평가로 딸의 바둑 실력을 확인한 부친은 당시 지방(전남 광주)에서 서울과 분당 등으로 이사하면서 새 스승인 유창혁 9단 도장을 찾아 나섰다. 1990년대 세계 바둑계를 풍미했던 유 9단은 일본 후지쯔배(1993년)와 응씨배(1996년), 삼성화재배(2000년), 춘란배(2001년), LG배 세계기왕전(2002년) 등까지 차례로 우승하면서 세계 바둑대회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국내 바둑계 간판 스타였다.


“아버지의 헌신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날 저도 없었을 겁니다. ‘한번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 되지 않겠느냐’며 밀어준 아버지의 응원이 절대적이었어요.” 최 8단이 세계 1위에 올라선 배경을 부친에게서 찾은 이유였다.


최정(맨 오른쪽)이 지난 10일 중국에서 열린 궁륭산병성배 세계 여자바둑대회

결승에서 왕천싱과 대국을 벌이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정상에 섰지만 최 8단은 가시밭길도 걸어야 했다. 무엇보다 한창 뛰어 놀아야 할 때부터 승자와 패자만이 있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무조건 이기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그랬어요. 어정쩡한 중간은 용납되지 않았거든요. 혼란스러웠습니다.”


최 8단은 어릴 때부터 바둑판 밖에서조차 가치 판단 기준을 모두 이분법적으로 나눠 살아야 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 잡혔다고 토로했다. 그가 고교 1학년 때까지 다녔던 학업을 멈춰야 했던 이유도 결국 승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간직한 학창시절의 추억 또한 포기해야만 했다.


많은 걸 희생한 탓이었을까. 최 8단은 남ㆍ녀 경계선을 넘어서 확실한 족적을 남기고 싶어했다. 각종 여자 바둑기전에서 수 많은 우승을 경험한 최 8단이 지난해 쟁쟁한 남자 프로기사들 사이에서 21.5대1의 경쟁률을 뚫고 본선 진출까지 성공한 LG기왕전을 생애 최고 성적표로 꼽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아직도 배가 고프다”며 제시한 그의 목표도 분명했다. “‘태양을 향해 쏜 화살이 가장 멀리 날아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제가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남ㆍ녀 통합기전 우승을 향한 최 8단의 집념은 이미 그의 반상 행마(行馬)를 재촉하고 나섰다


[덧붙이는 글]
한국일보 허재경 기자가 쓴 11월21일자 세계 여자바둑대회 싹쓸이 최정 8단 “아직도 배가 고파요” 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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