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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8-23 12:19:09
  • 수정 2019-08-23 15: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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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 함양은 노사초배로 들썩인다. 오랜만에 각 부문 최강자들을 가리는 오리지널 전국바둑대회가 치러지는 것이다. 40명가량의 프로들도 오픈최강부에 출전한다고 하니 진정한 프로암대회 역시 볼만할 것이다. 대회를 이틀 앞두고 사초(史楚) 노석영 국수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자.


1975년생 이창호보다 딱 100년 앞섰다. 일제항쟁기에 돌입하게 되는 시기인 1875년 경남 함양군에서 태어났고 광복을 맞은 1945년 생을 마감했다. 노사초(盧史楚)의 본명은 석영이며 사초는 호.


▲ 이번 주말 경남 함양 고운체육관에서 600여 기객들이 참가한 가운데 노사초배가 성대하기 치러진다. 사진은 작년 대회 모습.


당시는 순장바둑시대였다. 순장바둑은 흑백 상호간에 열 석 점의 기본 치석을 놓은 후 바둑을 시작한다. 요즘처럼 포석단계는 없다고 할 수 있으며 필연적으로 수읽기에 바탕을 둔 전투력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백남규를 스승으로 모신 노사초도 당연히 전투형이며 큰 기술을 구사하는 큰 바둑이었다. 한국바둑이 여전히 실전적이며 힘 바둑인 이유는 이러한 순장바둑 DNA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처음 백남규에게 사사할 때는 6점 바둑이었으나 몇 해 지나지 않아 곧 맞수가 되었다.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했고 30세가 지나서야 비로소 바둑에 정진해 국수가 된다. 특히 노사초는 하수 다루는데 명수였다. 고령의 윤경문 국수에게 노사초가 정선이었을 때 윤경문은 같은 하수를 5점 접는데 노사초는 6점을 접고도 이겼다고 전한다.


1937년 제1회 전조선위기선수권대회에서 노사초는 7승2패의 성적으로 우승한다. 당시 참가 선수는 노사초를 위시하여 채극문 민중식 정규춘 윤주병 권병욱 유진하 이석홍 장규황 권재형 등 내로라하는 조선의 국수 10걸이 모두 출전했다. 특히 20년 연하였던 유진하 이석홍은 노사초의 제자들이었다. 당시 62세로 이미 정점에서 한참 지난 시기였음에도 노사초의 기재는 '주머니 속 송곳'이었다.


▲ 경남 함양 개평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앞산에 2008년 노사초공원을 조성해 노사초사적비를 세웠고, 그해 노사초배가 탄생하게 된다.


노사초는 과감한 사석작전에 능통했고 바꿔치기를 이용한 형세판단력이 탁월한 고수였다. 바꿔치기에는 패싸움이 의당 따라붙는 법이며, 패싸움을 능수능란하게 해냈다는 뜻에서 ‘노패(盧覇)’, ‘노상패(盧上覇)’라는 수식어가 지금도 그를 따라다닌다. 바꿔치기, 패싸움, 형세판단력은 오청원의 특장점과도 흡사한 부분인데, 역시 동서고금의 고수들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판단이 우월한 법인가보다.


노사초가 순장바둑의 대가라고 해서 현대바둑의 문외한이란 오해는 거두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깨닫고 있었다. 노사초가 활약하던 시기는 근대와 현대의 경계였음에도, 노사초는 일본에서 들어온 현대바둑도 앞장서서 받아들인 인물이다.


앞서 살펴본 제1회 전조선위기선수권대회가 있었던 1937년 말 한국기원의 전신 경성기원에서는 전래의 순장바둑 폐지를 결의하고 일본바둑을 공식 채택한 원년이기도 했다. 노사초를 위시한 '기득권자' 노(老)국수들은 시대의 흐름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새로운 바둑’에 적응할 준비를 했다. 결국 바둑은 같은 것이니까.


▲ 노사초 생가를 지키는 노사초 국수의 맏며느리 이정호(당시 92세, 2016년 작고) 여사와 손녀 노말해 씨. 공교롭게 기자가 찍은 이 사진이 이여사의 마지막 생전 모습으로 남았다.


노사초는 만년이었던 1942년 일본기원에서 입단한 청년 조남철과 기념대국을 가졌고, 1944년 일본의 기다니미노루(木谷實)와 여자프로 혼다가즈코(本田壽子)가 방한했을 때 조선의 대표로서 혼다에게 백을 들고 일본식 바둑으로 만방을 이겼다. 당장 일본을 가더라도 3단 실력을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프로가 없던 시절 '촌로 노사초'가 세련된 일본 프로를 향해 거둔 쾌거였다. 오청원(吳淸源)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받은 단위가 3단이다.


둘째 아들이 일본유학 중에 일본에서 결혼을 하게 되어 한 달간 일본여행을 다녀온 노사초는 일본에서 대활약 중이던 천재소년 오청원을 대하고는 “이슬만 먹었는지 기린처럼 미끈하고 맑아서 물욕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인물평을 남기기도.


▲ 이여사의 별세 후 노사초의 장손 노철환 씨 내외가 이곳에 기거한다.


노사초는 약관의 나이로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마당에 더 이상의 대과출시를 포기함으로써 전도유망한 벼슬길을 접는다. 대신 바둑을 벗 삼아 전국을 유랑하며 인생의 낙을 삼게 된다.


해산한 며느리의 약을 구하러 나섰다가 친구를 만나 한양으로 내기바둑 길을 나서는 등 방랑기질도 다분했다. 전국을 유랑하며 내기바둑에 심취하여 자택 등기가 27차례나 바뀌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


러나 노사초에게는 함양선비의 피가 언제나 흘렀다. 선친의 가산을 정리하여 10만 냥을 국난극복자금으로 헌납하기도 했고, 하수와도 격의 없이 잘 어울렸고, 내기로 딴 돈을 가난한 바둑지인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일찍이 스승 백남규가 개성의 박정현에게 내기바둑으로 큰돈을 잃자 박국수를 찾아가 바둑으로 잃었던 돈을 바둑으로 찾아주기도 했다.


노사초 정신은 청심과욕(淸心寡慾)이다. 바둑 잘 두는 비결은 늘 깨끗한 맘으로부터 출발하며 맘이 깨끗하지 못하면 최선의 수를 찾지 못한다고 설파했다. 위기십결 가운데 부득탐승(不得貪勝)와 흡사한 덕목이라고 하겠다.


▲ 사초(史楚) 노석영(1875~1945).


말년에 후배 국수였던 해초 유진하가 “사초선생께서는 타개하시면 바둑을 두고 싶어서 어찌하렵니까?” 묻자, “천국에는 기선이 있는 곳. 어찌 그런 걱정을 하겠는가. 훗날 사람들이 나를 묻거든 일러주게. 固一世之善棋더니 而今安在哉야(진실로 한 시대의 잘 두는 바둑이더니 지금은 어디로 갔느냐)라고 말일세.”라고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구절을 자주 인용했다. 1945년 봄 노사초배 타계했을 때 그 구절을 만장(挽章)으로 크게 써서 상여 뒤에 걸었다고 한다.


불세출의 천재기사 이창호도 스승 조훈현을 만나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요, 천하의 조훈현도 한국바둑의 개척자 조남철이 있었기에 존재 가능했다. 조남철의 위대함도 그 이전 노국수의 최고봉 노사초가 있었기에 가능한 탄생이었다. 노사초는 이렇듯 현대와 근대의 경계인이었다.


활짝 갠 이번 주말, 함양에서 600여 노사초의 후예들이 100년 전 노사초(盧史楚)를 만난다.


※ 이 기사는 현장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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