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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10-30 07:5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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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 9단은 “조남철 선생으로부터 국수위를 물려받았을 때가 가장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사진출처=조선일보)

 

"잊고 지냈는데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나… 감회가 새롭네요."


'영원한 국수' 김인(75) 9단이 프로 생활 60주년을 맞았다. 그는 1958년 10월15일 고 강철민 8단과 함께 제8회 입단 대회를 통과, 프로가 됐다.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아오고 있는 김국수를 지난주 한국기원에서 만났다.

 

15세 입단 당시 기억이 나십니까.
"그때는 기사 수가 노국수들 포함해 30명도 안 됐어요. 바둑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은 시절이었지만 입단 대회 열기는 뜨거웠죠. 2명 뽑는데 3자 동률이 나왔고, 재대결 끝에 입단해 기뻐했던 생각이 납니다."

 
기사 생활 60년은 조남철 9단의 58년을 넘어선 국내 최장 현역 기록입니다.
"그렇다고 감히 조 선생님 업적과 비교할 수는 없죠. 개인적으로도 은혜를 많이 입었어요. 그 어른 아니었으면 기타니(木谷實) 도장 문하생이 될 수도, 많은 분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었지요."

 

일본서 눈부신 활약 도중 귀국했는데….
"병역 때문이었어요. 더 머물렀다면 좀 더 발전했겠지만 아쉬움은 없습니다."

 

63년 귀국 뒤 조남철 아성을 허물고 30회나 우승했습니다
"국수전 우승으로 세대교체를 이룬 후 10여년이 내 전성기였죠. 돌아보면 그때 좀 더 치열하게 정진하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주변에서 추어주다 보니 부담도 컸고, 그러다가 편하게 안주해 버린 거지요. 최고의 경지에 오르지 못해 미련이 남습니다."

 

세계 패권이 일본과 한국을 거쳐 요즘엔 중국으로 옮겨가는 분위기입니다.
"천쭈더(陳祖德)씨 등 내 연배의 중국 원로 기사 대부분이 일본어를 잘합니다. 바둑 선진국인 일본을 배우기 위해 따로 공부한 거죠. 한국 바둑의 전성기가 조금만 더 이어졌더라면 중국·일본 기사들이 한국어를 익혔을 텐데, 그런 상황까지 못 이른 게 아쉬워요. 그래도 한국을 세계 최강으로 이끈 후배들이 자랑스럽죠."

 

60년 프로 생활에서 느낀 교훈이라면.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리적 안정입니다. 마음이 평온해야 바둑의 참맛도 느끼고 실력도 최대한 발휘하게 되죠. 나는 젊은 시절 면벽(面壁), 묵상, 야산 오르기 등으로 마음을 철저히 다스렸습니다."

 

요즘도 바둑돌을 잡으시는지…. 2015년 이후 공식전 전적이 안 보입니다.
"아마추어들과 가끔 수담을 나누고, 후배들의 기보도 재미있게 놓아 봅니다. 사활(死活) 책은 나이 든 지금도 자주 눈이 가요. 공식전에 안 나가고 있는 이유는…나중에 알려줄게요(웃음).

 

바둑계가 몹시 시끄러운데 원인과 처방을 듣고 싶습니다.
"구성원들이 각자 자기 자리를 지키며 본분에 충실하면 문제 될 일이 없습니다. 원인도, 처방도 이 한마디 안에 다 들어 있어요. 긴말 않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위 기사는 10월30일자 조선일보 이홍렬 기자가 쓴 <<< 기사생활 60년… "최고 경지 못 가봐 미련 남아">>>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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