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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11-18 21: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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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타이젬 '나는 유저다'에서 2015년 6월 24일에 쓰여진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 '현주표밥상'은 늘 부산바둑인에겐 든든한 밥차.
사진은 부산시장배에서 옹기종기 식사하는 모습.

지난 4월 부산 사직체육관에서는 부산시장배바둑대회가 열렸다. 기자도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부산 바둑인들과 회포도 풀 겸 취재도 할 겸 사직체육관을 찾았다.

시집가는 날 등창난다고, 봄비치고는 많은 양의 비가 쏟아져서 모처럼 바둑축제를 즐기려는 팬들에겐 제법 성가신 날이었다. 오전 대국을 마치고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체육관 주변은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마다 사람들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체육관 밖 상가로 점심을 해결하러 나가는 일이 꽤 성가시게 된 것이다.

이럴 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배달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그때 지인이 기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밥 먹으러 가자'는 투. 몇 걸음을 걸었더니 희한한 광경이 나온다. 체육관 둘레를 따라 늘어져있는 처마 아래 돗자리가 몇 개 펴지더니 익숙하게 남녀 구분 없이 자리를 잡는다. 마치 노동일을 잠시 멈추고서 맛있는 참을 기다리듯.

'아니, 여기서 이런다고 밥이 나오나 죽이 나오나?' 잠시 의아했지만 곧 정답이 발표된다. 밥이 나왔다. 시락국(시래기국의 경상도 방언)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죽죽 찢어 발린 뻘건 김치하며 각종 전과 고등어조림 등등 먹을 것이 '밥차'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밥차'의 주인장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매우 익숙한 동작으로 무려 4~50명의 끼니를 척척 해결해주는 것이었다. 바둑인들은 역시 익숙한 동작으로 협소한 공간에서도 군말 없이 1차 2차로 나뉘어 '집 밥'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밥차라고 하면 근사한 이동급식소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저 승용차에 이것 저것 포장해서 나온 것이다. 부산바둑인들은 그 밥을 '현주표 밥상'이라고 불렀다.

▲ 부산여성바둑연맹 회원들에게도 유명한 현주표밥상. 맨 왼쪽이 '연산스타일' 사장 김현주 씨.

부산에 들르면 꼭 가봐야 하는 음식점이 있다. 뭐랄까, 음식점이라고 하기에도 술집이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한 그런 '밥술카페'. 뭐 라면도 있으니 분식집이라고 해도 되겠다. 바둑삼매경에 빠져있다 때를 놓치거나, 기우와 밥내기 술내기 바둑의 결말을 보고 싶으면 늘 가는 밥집이자 술집이자 카페를 겸하는 곳 바로 '연산스타일'이다.

이 연산스타일은 부산바둑인 뿐만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 바둑인들과 심지어 프로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특별히 요리가 기발하다든지 근사한 술이 나오는 그런 유흥주점과는 물론 다르다. 그저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되고, 마시고 싶으면 마시면 되는, 뭐든지 다 차려주는 '누님의 밥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 90퍼센트 될 거에요."
타이젬 17급인 주인장 김현주 씨는 이곳에 오는 손님의 90퍼센트는 바둑인이란다. 일반 손님이 안 와서 90퍼센트가 아니라, 바둑인들이 거의 다 이곳으로 집결하기 때문에 나온 수치라고.

처음엔 당연히 일반음식점이었다. 그러던 것이 3년전 쯤 인근에 기원이 들어서면서 기원 손님들이 주로 드나들었고, 그들은 밥 때를 놓치면서까지 바둑삼매경에 빠진 경우가 허다했다. "바둑판을 쳐다보면 밥이 나오는지 술이 나오는지, 그렇게 재미가 있을까 싶었죠. 기원이 문을 닫으면 또 여기서 바둑을 두기도 하고 그랬죠."

▲ '현주표밥상'의 주인장 김현주 씨.

사실 돗자리를 깔고서 노상식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작년 경남 함양에서 노사초배 전국아마대회때도, 시외출장을 한 적도 있다. 부산서 떠나는 출전선수가 거의 그녀의 단골손님(그녀는 '식구'라고 표현했다)이다 보니, 팬서비스 차원에서 함양까지 따라가서 '출장 밥차'를 운영한 것. 그 후로도 크고 작은 부산의 기우회 모임 때도 늘 그녀는 출장을 가곤했다.

고도의 마케팅 수법은 아닐까? 기자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금세 본전도 못 뽑게 만든다. "아휴, 밥 팔아서 얼마 된다고 그러세요. 그리고 자주 있는 일도 아닌데요. 늘 대하는 분들 밥 한 끼 대접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또한 저도 바둑인이니까 같이 야유회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저와 연이 되었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주려는 것뿐이에요. 뭐, 찬조금을 냈다고 생각하면 되죠."

그녀가 사업을 시작한 것은 대략 3년쯤이다. 아이들 다 키우고 집에서 노느니 시작한 사업이기에 손해만 안보면 된다는 넉넉한 맘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주부처럼 하는 정도죠. 드시는 분이 입맛에 맞으면 좋은 것이죠. 음식을 맛으로 먹는 게 아니고 정으로 먹는 것이니까요."

처음 이 명소를 개척한 바둑인은 누구였을까. 지금은 작고한 백승이 부산바둑협회 전무가 첫 바둑손님이란다. 그가 생전에 있을 때 '수담사랑'이라는 기원을 개설한 뒤, 그와 어울리던 김철중 하형수 등 동패 몇몇도 따라왔단다. 그러다 부산바둑인들 사이에 편안한 누님 같은 명소가 있다는 입소문이 나자 삽시간에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

최근 그녀에게는 바둑인들의 사인을 받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가끔 유명한 음식점을 가다보면 유명 연예인들이 왔다 갔음을 기념하는 사인보드를 보게 된다. 바로 국내에선 유일하게 바둑인 사인을 버젓이 음식점에 붙여놓은 곳이 '연산스타일'일 것이다. 이기섭 김종준 천풍조 강지성 장건현 등 노장청 프로들도 있고 김철중 함중아 박창규 엄용수 등 알만한 이름들은 다 붙어있다. 그 끄트머리에 기자의 사인도 자랑스럽게 붙어있다.

"제가 바둑을 알고 난 다음부터 여기 오시는 손님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한 장 한 장 모았다가 이렇게 붙여 두었어요. 여기는 바둑인들의 집합소라는 자랑이죠.(웃음)"

▲ '연산스타일' 내부 벽면엔 이곳을 방문한 부산바둑인과 프로들의 사인이 붙어있다.

처음엔 바둑의 '바'자도 몰랐다. 그러나 바둑인들과 수년을 동고동락하다보니, 바둑을 조금이나마 알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는 그녀는 현재 타이젬 17급. 워낙 바둑인들의 대화 속에서 바둑정보가 많다 보니 기력은 17급이지만 바둑정보는 입신급이다. 바둑을 즐기기 이전부터도 타이젬 뉴스란을 즐겨보았기에 기자의 이름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 가끔 틈이 나면 인근 기원에서 부산여성연맹회원들과 수담을 나누기도 한다. 아니 배운다.

연산스타일에는 메뉴판이 따로 없다. 손님 맞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밥차' 운영에서 보듯 음식 솜씨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안되는 음식이 없어서 따로 별 다른 메뉴판이 없다. 참치회부터 치킨 라면까지 먹고 싶다면 배달을 시켜서도 해결해준다. "처음에는 당연히 메뉴판이 있었죠. 그런데 가까운 곳에 시장이 있다 보니 드시고 싶은 것은 모두 사다가 요리를 해주게 되었어요. 이제는 손님들이 좋아하는 안줏거리 요깃거리를 다 알죠."

혹시 처음 오는 손님이 바둑을 모르는 분이라면 이런 바둑적인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을까. "처음 오시는 손님에겐 저희 집은 특별한 것은 없고 보통 먹을거리는 모두 다 되니 드시고 싶은 것 말씀해달라고 합니다. 돈은 다른 집에서 주는 만큼 내시라고 하죠. 그러면 의아하게 생각하긴 해요. 테이블에 바둑판이 놓여있고 컴퓨터엔 늘 바둑이 두어지고 하니까요. 그런데 곧 '나도 바둑을 두는데' 하고 반응을 보이시는 분도 계시고, 또 전혀 모르는 분이라면 17급인 제가 바둑을 가르쳐 주기도 하죠.(웃음)"
▲ 오른쪽에 기자의 사인도 자랑스럽게 붙어있다.


'연산스타일'이 중년 바둑인들만의 아지트는 아니다. 각지에서 부산에 들른 바둑인들, 그리고 젊은 바둑친구들도 자주 온단다. 그녀가 바둑 두는 사람을 유달리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순수해서라고.

"부산사람들이 투박하지만 속정이 많은 사람들이잖아요. 다들 한 식구로서 한편으로는 도와주시려는 모습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저절로 아랫사람은 친구처럼, 윗사람은 깍듯이 오라버니처럼 대하게 되었죠. 알아서 드시고 음식 값도 알아서 주시고, 저는 주는 대로 받고 그래요."

수 십 년간 바둑을 두어온 분들이 오늘 또 한판을 이기면 생전 처음 이긴 것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 같다고 한다. 친한 기우들끼리 마치 목숨이라도 걸듯이 말다툼하다가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또 내일 마주앉아 바둑을 두는 모습 또한 순수한 바둑인이 아니라면 찾을 수 없는 표정들이라고.

"진짜 바둑이 이토록 재미있는 것일까 하고 가끔은 바둑책을 펼쳐서 혼자서 두어보기도 하지만, 아직 17급이라서 한판 제대로 끝을 내지는 못해요. 좀 더 바둑이 세지면 그들의 맘과 같아지지 않을까 해서 여성연맹에도 가입하려고 해요. 저는 타이젬이 좋던데요. 계가도 알아서 해주잖아요!(웃음)"


▲ 오늘은 바둑두는 날. 17급인 김현주 씨는 올해안에 15급으로 올리겠다고.



▲ '연산스타일'은 타이젬에서 만든 기념품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고, 이 방 한 구석에는 타이젬이 늘 켜져있는 컴퓨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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