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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10-30 10:05:32
  • 수정 2017-10-30 10:5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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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타이젬 '나는 유저다'에서 2014년 73월 30일에 쓰여진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 원주를 대표하는 바둑인 이웅기. 그는 자칭 타이젬 8.5단이다.


원주 경내에서 제일 이름난 산은 치악산이다. 명랑한 빛도 없고, 기이한 봉우리도 없고, 시꺼먼 산이 너무 우중충하다. 중중첩첩하고 외외암암하여 웅장하기는 대단히 웅장한 산이다. 그 산이 금강산 줄기로 내린 산이기는 하나, 용두사미라고 하여 금강산은 문명한 산이요, 치악산은 야만의 산이라 이름 지을 만하다. 100년이 더 지난 얘기지만 이인직의 신소설「치악산」에는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그는 학창시절 고려대 기우회 기호회(棋虎會)멤버로 대학강자로 소문이 이미 났다. 졸업 후에도 줄곧 바둑을 떠나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언제 어디서나 바둑대회만 있으면 목발을 짚고 대회장마다 나타난다. 목발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이미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지 오래. 원주하면 치악산이고 치악산하면 호랑이가 아니던가. 치악산호랑이 이웅기(62)씨를 만났다. 타이젬에서 워낙 많은 판수를 자랑하기에 눈여겨보았다가 기회가 되면 소개를 할 참이었다.

그는 한때 입단대회에 본선멤버이기도 한 소위 전국구였다. 96년 안달훈 한종진이 입단했을 적에 김찬우 심우섭 등과 함께 최종본선에 뛰어들어서 6승5패의 나름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당시 순수 일반인은 심우섭과 이웅기 단 두 명이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당시에도 술을 좋아하다보니 위장에 병이 생겨서 링거를 꼽고 입단대회에 출전했던 기억이 새롭다"고 술회했다.

벌써 20년이나 흘렀지만 95년 천리안배 우승경험이 있고, 97년엔 당시 최고상금을 걸었던 세실배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바도 있었다. 왜, 작년 고교동문전 결승에서 부산 경남고와 겨루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바둑팬들이 제법 많다. 당시 바둑TV에서 해설을 담당했던 한철균 프로의 대학 선배가 이웅기다.

▲ 작년 고교동문전 경남고-휘문고 결승 장면. 오른쪽이 이웅기(오른쪽).

고교동문전에서 보니까 서울 휘문고 졸업이던데, 원주가 고향입니까?
84년 처가가 있는 원주로 왔어. 처가도 원래는 충주인데 원주 문막에 터를 잡고 계셨는데, 내가 서울서 사업을 망하고 오갈 데가 없으니 때 아닌 처가살이를 하게 된 것이지. 이곳에서 2남1녀를 다 기르고 터를 잡은 지 벌써 30년이 되었어. 유행가 가사처럼 제2의 고향이 된 게지.

원래 그럼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학교를 나와서 76년도 24살 어린 나이에 서울 강동구에서 보일러 부품도매를 했어. 형이 하던 사업이었는데, 처음엔 도와주고 있다가 나중엔 독립을 했지. 처음엔 잘 되었는데, 술과 친구를 너무 좋아하니 돈이 쌓이질 않더군. 사업도 재주가 있어야 한다고, 저는 어음을 무조건 받아주고 떼어먹히는 거야. 알면서도 사기를 당해준 것이지. 거래처에서는 갚을 돈이 있어도 안 갚고 딴 데와 또 거래를 트고 그러더라구. 사실 나는 그때 더 어려웠는데 남이 어려워하는 것을 보면서 돈을 못 받아내겠더라고.

그럼 그 뒤 곧장 원주에 터를 잡으셨나요? 원주 하면 이웅기로 통하는데.
84년도에 원주에 장착하자마자 또 내가 정선으로 횡 하니 도를 닦는다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어. 음양오행을 공부했는데 그래서 지금도 독심술이 좀 있지. 당시 선생이 있었는데 진도가 빨리 안 나가서 내가 책을 모두 싸들고 입산해서 공부를 독학으로 공부했지. 10개월 정도 공부하다 하산했는데, 의외로 그 덕분에 건강을 찾게 되었지.

그럼 그 즈음엔 바둑과는 동떨어져 있었나요?
바둑을 두면 친구들이 몰려드니까 입산했을 때는 건강도 찾고 친구들도 좀 줄어들었지.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85년 초에 아예 철학관을 차리기도 했어. 그런데 이게 손님이 안 오는 거야. 그래서 심심하던 차에 동네기원을 갔지. 그랬더니 이번엔 바둑친구들이 몰려와 철학관에서 자장면을 시켜놓고선 온통 바둑만 두러 오는 통에 그 철학관마저도 문을 닫아버렸지. 그때 인연으로 지금 이 친구 (옆에서 바둑을 두던 분을 가리키며)를 아직까지 만나고 있지. 지금의 원주바둑협회 사람들이 되었지만.

부인께서 엄청 고생 많았겠습니다.
그 사람은 천사지. 지금 자식 농사를 그 사람이 다 지었다고 볼 수 있지. 아들 딸 삼남매 다 이젠 밥벌이를 하니까 안심이지. 딸은 헤어디자이너고, 큰아들은 닥터헬기 조종사, 막내아들은 골프캐디로 열심히 살고 있어. 이젠 가족에게 폐는 끼치지 말아야지 하고 있어.


▲ 이웅기 씨와 원주바둑협회 회장 박창일 씨는 바둑으로 맺어진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


학창시절은 어땠나요? 목발의 의지하고 계신데 소아마비였나요.
휘문고 고려대를 다녔는데 대학은 3학년까지밖에 못 다녔어. 학점도 펑크 났을 뿐 아니라, 이런 성적으로 다니면 뭣하나 하는 생각이 많았었어. 어중간한 것은 내가 못 보거든. 바둑은 동네 10급인 형을 통해서 알게 되었지.중2때 기원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 기량이 일취월장했지. 2살 때 한국전쟁 말기였는데 당시엔 사회가 엉망이니까 우리 또래는 소아마비가 많이 전념되었어.

프로가 되려고 생각했으니 입단대회에도 나갔던 거 아닌가요?
프로에 대한 열망은 솔직히 없었어. 프로들도 톱스타가 아니면 힘들게 산다는 것을 일치감치 알았기 때문에, 입단대회에 입단을 하러 간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전국대회의 일환으로 출전하곤 했지. 뭐, 실력도 안 되었고.

그래도 과거에 이세돌과도 10번기를 했다고 들었는데요?
권갑룡 도장에 놀러 가서 입단 직전 이세돌이랑 10번기도 하고 그랬지. 내가 지면 1만원을 내고 이기면 권사범이 나에게 양주 최고급으로 한 병을 가지고 가라고 했거든. 세돌이에겐 한 판을 이겼는데, 아마 내가 하도 지니까 한판 쯤 져줬던 것 같아. 하하. 그 뒤 이세돌이는 곧장 입단했지.

살아보니까 원주가 뭐가 좋습디까?
정붙이고 살면 다 고향이지만, 나에겐 생명을 준 곳이 원주야. 친구들도 많고 술도 좋아했으니 서울에 계속 있었으면 난 죽었을 지도 몰라. 그러나 지금은 내 얼굴이 많이 좋아지고 맑은 공기 마시니 몸도 안 좋아질 수 없겠지.

타이젬에서는 은근히 'joonki과'던데요?
그래서 지금은 시간만 나면 타이젬만 둬. 그런데 타이젬에는 센 사람이 너무 많아. 과거엔 술 마시고 둬도 9단이었는데 요즘엔 어림도 없어. 젊은 프로들하고 두고 싶지만 안 둬 줘. 한판 배우려면 내가 성적을 많이 올려야겠지. 그런데 틈만 나면 8단으로 떨어져. 그럼 중국1방가서 9단으로 또 돌아오곤 하지. 아무래도 중국 초고수급은 고수1방으로 다들 넘어오니까 중국1방에는 조금 수월하지. 나름대로 9단에서 버티려면 요령이 필요해. 하하.

▲ 원주바둑인들과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자리. 왼쪽부터 하만호 조철수 박창일 이웅기. 하만호 씨는 진주태생으로 땅 전문가. 그도 바둑을 끊을 수 없는 지라 전국을 떠 돌아다니다 이웅기 씨가 있는 원주로 올라와서 살고 있다. 타이젬 ID는 '能除一切苦'(능제일체고-능히 일체의 모든 고통을 제거한다는 뜻.) 또 조철수 입시학원장은 이웅기 씨가 처음 원주에 터를 잡으면서부터 알고 지낸 마음 넉넉한 후배로, 그 또한 서울 사람이면서 원주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박창일 원주바둑협회장은 TV에 나오는 이웅기 씨를 본 이후 곧장 그의 제자가 되었다. 타이젬엔 일주일에 두세 번은 들어와야 직성이 풀린다고. 'pci0619'이라는 ID로 총 6000판 가까이 두었단다.

자칭 타이젬 8.5단인 그는 몇 달 전까지 '계란마끼'였다. 자신이 가장 잘 만드는 안주가 계란말이여서 그렇게 만들었다고(마키(まき)란 '말다'는 뜻의 일본어). '계란마끼'로는 6026승 5023패 66무를 기록한 채 '원주포차'로 개명했다. 그 정든 ID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 새로운 ID '원주포차'를 만든 것은 순전히 그의 아내가 원주에서 실내포장마차를 경영하면서부터다. 6월25일 5단 ID '원주포차'를 개설한 후 '아휴~ 그새 500판을 돌파했네요~'.

과거엔 '쉰감자'였을 때도 있었어. 나이 50일 때를 뜻하는 쉰. 그리고 내 상태가 좀 쉬었잖아? 그래서 '쉰'이란 수식어에 강원도의 상징 감자를 합쳐서 '쉰감자'였지. 그리고 '원주이원장'을 거쳐서 '계란마끼' '원주포차'로 개명했어. 하루에 30~40판 날새기로 두는 날도 있지.

이웅기 씨의 지금 직함은 원주시바둑협회 감사. 간만에 원주 한국기원에서 기자가 들린다고 하자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원주바둑협회 친구들이 나와 주었단다. 지금 원주바둑계를 지탱하는 사람들이었다. 입시학원을 경영하는 조철수 원장(타이젬 7단)과 장창일 원주바둑협회장(타이젬 4단) 그리고 올드팬이라면 그 이름을 기억하실 텐데 하만호(타이젬 8단)씨라고, 이웅기 씨의 유일한 호선 친구이며 그도 한때 전국구였다. 그들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모두들 이웅기 씨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형님은 정확하고 분명하고 명쾌하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고지식하죠.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하고 카리스마도 철철 넘치죠. 자기 사람들은 지킬 줄 알고 정이 필요이상으로 많아요. 또한 늘 부딪히기도 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뻣뻣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잖아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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