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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10-30 10:03:14
  • 수정 2017-10-30 10: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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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타이젬 '나는 유저다'에서 2014년 7월 21일에 쓰여진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 '한국남'은 온화한 웃음을 간직한 스님이었다.

어느 날 대화창에다 "제가 경주를 가는데, 혹시 만나볼 유저가 없을까요?"라고 의견을 구하자, 곧장 '한국남'이라는 ID를 복수의 유저들이 일러주었다. "그 양반 땡중인데, 활도 쏘고 좀 괴짜입니다. 꼭 경주 가시면 만나세요." 땡중? 기자는 구미가 당겼다.

마침 장마의 시작이다. 흔히 비오는 날은 대개 운치가 있어 막걸리에 파전이 생각난다지만, ID만 믿고 낯선 이방인을 찾아 나서기엔 여간 성가시지 않다. 세계아마바둑선수권 경주대회에 취재차 갔다 겸사겸사 경주남자 '한국남'을 만나는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택시를 돌릴 수 있을 만큼 넓은 마당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앉으면 내려앉을 것 같은 마루턱에 앉아서, 그는 오래된 발을 옆으로 밀어제치며 택시에서 내리는 기자를 맞이한다.

"온다고 욕 봤겠네!"

▲ 그가 기거하는 오두막집인 개인 사찰 보문사.


'아니, 이 분이 고수2방의 군기반장 한국남?'

한눈에 180은 더 되어보이는 높이에 승복을 입은 모습이 이채로웠다. 비를 피해 재빨리 발을 젖히며 마루에 걸터앉자, 한눈에 고물로 보이는 PC가 눈에 들어온다. 그는 순전히 오래된 PC 한 대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타이젬과 통교하는 루트.

눈만 뜨면 타이젬을 접속해서 잠을 잘 때도 타이젬 켜놓고 산다고 했다. 거의 하루 종일 유저들의 대화를 경청하기도 하고, 때로는 수다에 직접관여하기도 하고, 빅게임도 관전하면서, 조용한 음악방의 은은한 선율에 자판을 맡긴 지 어언 10여 년째란다.

한국남자라는 뜻의 한국남. 그는 경주에서 더욱 숨어 들어가는 지역에서 허름한 오두막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세 평 남짓 그가 주로 일 하는 공간을 훑어보니 이미 혼자 사는 데 최적화 되어있었다.

▲ 3평 남짓한 개인 공간엔 '고물PC' 한 대로 타이젬을 즐기고 있었다.

 
유저들이 '땡중'이라고 하던데요?
하하. 난 그런 말 안했지. 대화창에서 여러분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유저들이 편하게들 생각하겠지.

전번에 뵐 때는 18급이었는데, 17급으로 승급했네요. 이걸 축하해야 할지?
18급인데 王昭君(왕소군)이 자꾸 두자고 해놓고선 자기가 던져버리는 통에 졸지에 17급이 되었어. 난 18급으로 남고 싶은데, 왜 17급으로 올리느냐고 야단을 쳤지.

진짜 급수는 몇 급입니까?
머리 깎기 전에는 기원에서 9급 정도 되었지. 기원은 9급이 마지노선이지 아마. 타이젬에서는 18급으로 놀지만, 실제로는 한 5~6급 될 게야. 처음 배운 것은 68년이었으니 한 40년 되었나봐. 스무 살 언저리 때 PX방위였거든. 그때 졸병이 기원 4급을 두는데, 9점 놓고 배웠다가 나중에는 4점까지 따라 잡았지. 지금은 수다 떤다고 바둑 둘 시간이 많이 줄었어. 하하.

고수2방이 아지트인데 요즘은 고수1방에도 자주 들리시던데요?
수다를 떨려면 고수1방은 좀 부담스럽지. 최근엔 누가 플러스회원권을 선물해줘서 고수1방에도 가끔 들어가. 아무래도 고수1방에 들어가면 조용히 관전하게 돼. 왠지 고수들이 노니는 데라서 조심스러운가봐. 그래도 고수는 겁나.

흔히 수다맨들은 운영자와는 상극인데?
ID도 잘렸다가 다시 붙이기도 했고…, 운영자에게 제제도 받고 그랬지. 그런데 운영자54님과 이 한국남이를 혼동하시는 유저들도 있더라고. 54님이 좀 단호한 편이지. 그래서 54님의 일반ID가 한국남이라는 소문도 나고 그랬어.

왜 그렇게 잘리고 그래요. 스님이 점잖게 노시지 않고?
가끔 정치적인 발언도 하지. 그런 발언을 안해야 하는데 아직도 피가 끓는 열혈 청년인가 봐. 과거 노무현대통령 초상 때 경찰이 너무 삼엄한 경계를 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어. 그때 '저승에 가서도 경계해라'고 나름의 독설을 대화창에 토했지. 말을 하자마자 곧장 제제를 받았어. 그런데 입이 촉새라서, '탈퇴하고 가입하면 다시 ID를 살릴 수 있다'는 타이젬 금기발언을 해서 또 다시 잘렸지. 운영자님께 죄송하다고 얘기해 줘. 악의는 없었다고.

무례한 질문인데, 진짜 스님이십니까?
기자는 무례해야지. 2년 동안 행자승을 하고 사미승도 거쳤지. 태고종 승적을 가지고 있어. 행자할 때 35일 동안 매일 1080배 씩 했어. 지금은 그런 것 안 하니까 편하지. 사람들은 초라하면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하지.

▲ 작은 법당에서 포즈를 취한 한국남.

절에 간 계기는?
낚시꾼으로 12년 살고 가구사업 12년 하다가 사업이 망했어. 33살에 결혼했고, 사업실패 할 무렵인 45세에 세파를 잊어보자는 의미로 절에 들어갔지. 20년 전쯤부터 철학공부도 좀 했었어. 속세를 끊으니 좀 허전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때부터 타이젬을 접속해서 인연을 쌓았지. 낚시는 스님 된 이후엔 안하지. 오히려 방생해야지. 하하. 절에서는 만족감을 얻었나요? 절에 간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야. 결국은 맘에 병이 있더라고.

타이젬 절친한 유저들 한번 주르륵 열거해보세요.
'박찬'은 악당은 아닌데 날 땡중이라고 늘 놀리고, '본향'은 미국 사는데 날 바보라고 해. '자강불식'은 화난다고 탈퇴를 했는데, 그 순간 다른 분이 자강불식 ID를 챙겨갔지. 지금도 ID소유권 소송을 하고 있어. 하하. 새로 바뀐 건 숫자ID인데 기억이 안나. '앰바고'는 못된 짓은 안 하고 자기만족이여. '王昭君'도 좋은 분이고, '잊혀진제비'는 8단이고, 2단 박정현은 내 바둑이 기본이 안 되었다나. '달려미미짱' '달려김대리'도 친하고…. 친구등록이 된 기우들만 168명이라서 다 일일이 못 외워.

유저들이 가끔 부적하러 오십니까. 자주 오실 것 같은데?
물론 내가 가기도 하고 그들이 올 때도 있지. 그들이 아프다거나 일이 잘 안 풀린다고 하면 내가 정성껏 부적을 써주곤 하지. 몇 장씩 받아간 사람도 있고, 미국에도 부적을 부쳐주기도 했지. '효과 봤는가? 물으면 '효과가 없더라'며 부적 값을 안 줘. 아직 1장 값도 못 받았어. 하하. 다 사는 재미지 뭐. 부적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믿음 확신이 더 중요하지.

타이젬이 뭐가 좋습니까? 언제까지 노실 겁니까?
바둑을 두고 싶으면 바둑 둘 수 있고, 나처럼 혼자인 사람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고 수다도 떨고… 이보다 좋은 데가 어디 있어? 죽을 때까지 놀아야지. 타이젬은 정회원제를 해서 모조리 1000원씩 받아. 아, 또 회원 중에 점잖으신 분 많거든. 그 분들을 심야에 도우미라도 만들어서 활용해봐. 돈 안줘도 돼. 새벽시간에 욕하고 도배질 하는 놈들이 많아. 타이젬은 우리 놀이터인데 쓰레기가 많아지면 쓰나. 나부터 할게.

활을 쏜다고 들었습니다. 활 구경 한번 시켜주시죠?
활? 배운지 10년쯤 되었어. (방 한구석에 놓인 활을 잡으며) 매번 방구석에만 있으면 안 되지. 아침에 활 쏘러가곤 해. 집 앞에 조그만 강이 있는데 사람이 드문 곳에 장대에 매달아서 활쏘기를 하지. 대한궁도협회회원이기도 하지만 궁도협회 집행부에 밉보이면 잘리는 분위기가 싫어서 나 혼자 연습하지. 활쏘다보면 손가락 허리가 굉장히 좋아져. 활 쏘는 것 보고 싶어? 나가지. 5분만 가면 돼.

▲ '앞마당'엔 화살에 줄을 매달아 달아나지 못하게 만든 활터가 있다.

보문사 주지 성민(性敏) 스님은 늘 웃었다. '땡중'이라고 해도 좋고 '짜가중'이라고 해도 좋단다. 속상하고 늘 배반당하고 사기당한 인생이었지만 그는 늘 허허로움으로 이겨나간다고 한다. 순수했고 격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낮추면서 타이젬 중생들과 늘 가까이 있고 싶다고 했다.

기자가 떠나려고 하자 또 애꿎은 비가 내린다. 택시를 콜 해서 돌아가려고 하자, 손님을 우중충한 날에 그냥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며 굳이 마당 한쪽에 세워둔 애마를 부른다. 1993년 식 에스페로. 극구 사양하는 기자를 태우고야 만다.

"당신 호강하는 거야. 이거 아무나 못타는 것이야."

▲ 한국남의 애마 '93년식 에스페로'는 아직도 잘 굴러간다며 한사코 기자를 목적지까지 태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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