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인천 김종화 치과 내 인천바둑발전연구회관에서 열린 제98회 미추홀바둑리그 모습.
부모님의 원수를 찾아서 평생 뒤를 쫓던 주인공은 마침내 그 악당을 만날 천재일우의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평생 갈아온 검을 품은 주인공은 붐비는 저잣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악당을 그만 스쳐 지나쳐버리고 만다.
‘아, 저기 있는데…’. 관객의 탄식이 절로 튀어나온다. 영화에서는 관객의 바람처럼, 그 악당과 주인공이 쉽게 조우하지 못한다. 머, 삼류 무협영화의 흔한 장면이다.
오늘만 지나면 극성의 무더위도 가라앉겠지. 오늘도 무성하게 널브러진 풀과 곧 정리될 많은 초식과, 그를 호시탐탐 노리며 자세를 낮추는 맹수들이 딴 데 보는 척 어슬렁거린다. 미추홀 초원은 겉으로는 매우 평온하지만, 조용한 평화는 곧 있을 생존 전쟁의 복선과 같다.
하루에 몇 번 씩 먹는 밥이 지겹지 않듯, 매달 똑같은 대회를 하는데도 매달 새로운 화제 만발이니 이런 재미난 대회가 또 있을까. 미추홀은 매번 다른 반찬으로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는 ‘행복 언박싱’.
18일 오후2시 인천 모래내시장 인근 김종화치과 내 인천바둑발전연구회관에서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에 재미 들린 ‘밥을 잊은 그대’ 40명 총집결하여 제98회 미추홀바둑리그를 가졌다.
▲'프로 잡는 아마' 박동주 프로-김태세(승).
서능욱 나종훈 정대상 서중휘 최홍윤 박동주 등 신구 프로들은 호랑이그룹이며, 박중훈 김도협 김태세 안상범 윤명철 서부길 김동섭 한세형 곽웅구 최진복 등 무지막지한 표범그룹.
그리고 위 표범들과 한번 해볼 만하다고 느끼는 장혁구 소재경 하승철 권영기 노상호 송양석 남경석은 하이에나 그룹이며,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생태계 맨 하단 위치한 최병덕 윤천준 진재호 김종화 정충의 김미애 박미라 진종수 조성대 윤남근 김성중 등 살 붙은 고라니 그룹이다.
가히 기후변화에도 끄떡없는 모범적인 생태계 미추홀은 고단백 퀄리티.
이번 경기부터 고라니들에게 큰 하사품이 내려졌다. 처음 두 판은 3레벨 이하끼리만 둔다는 것. 이미 미추홀은 고수가 제 치수를 접어줘도 하수보다는 유리하다는 게 판명이 나서, 매번 도시락 대접을 받는 3레벨 이하에게 희망을 좀 드리려는 고도의 수작이다.
1라운드에선 비교적 준척급 이변이 일어났다.
먼저 나종훈 프로가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김형섭이라고, 푸른돌 출신의 강타자가 나거목을 이겼다. 김형섭은 지난번 영종도대회에선 서부길을 이긴 후 4강까지 올랐고, 지난달 미추홀에서는 서능욱 프로를 이겼다.
그리고 가끔 출전하는 비연구생 출신 강호 김태세는 박동주 프로에게 매운맛을 보여주었고, 친구인 명지대생 장우진도 해외바둑통 김도협에게 거꾸로 판 맛을 보았다. 그러나 같은 명지대생이자 미추홀 우승 단골 안상범은 첫 판부터 인천연구생 대선배인 박중훈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고 말았다.
▲김동섭-장혁구 간 흥미진진한 바둑에 많은 갤러리들이 몰려있다.
물론 다 호선으로 승부가 결정된 건 아니다. 소수점 레벨(실제로는 + -)이 등장했다.
과거엔 아마고수를 1레벨로 두고 프로나 주니어는 0레벨, 준척 1급은 2레벨, 동네 1급은 3레벨로 나뉘었다. 그 레벨을 좀 더 세분화하여 올 1월부터 레벨에 반영했다.
이를테면 성적표 이름 왼쪽에 3+1, 0-9 같이 표기된다. 지난 대회에서 우승(+3) 준우승(+2) 혹은 3승(+1)으로 입상을 하게 되면 덤을 추가로 상대방에게 제공하고, 같은 의미로 4패자(-2) 3패자(-1)는 추가로 덤을 받게 된다.
따라서 원래 2레벨에다 지난 대회에서 우승을 했으면 2+3이 된다. 그러면 만약 3레벨과 만날 때는 한 치수 차이니까 정선에다 3집을 더 하는 세부 치수가 완성된다.
즉, 0+4와 3-2가 만나면, 0레벨에서 4점이 세진 것이며 3레벨에서 2만큼 약해진 성적이다. 따라서 세 점 치수에서 사석 6개(4+2)를 추가하는 치수가 된다.
▲박중훈-서중휘(승).
2라운드까지만 잘하는 송양석은 다리가 부실한 고라니를 잡고 2승, 진종수도 조성대 박미라 등 허약한 토끼를 잡고 2승.
서능욱 최홍윤 서중휘도 프로답게 2승을 가져간다.
노상호가 정대상을 두 점에 7개 받는 치수로 꺾은 건 그래도 이변이다. 오랜만에 윤명철도 김동섭을 꺾어 체면을 세웠다.
여기서 눈길이 가는 건 최병덕의 2승이다. 4레벨의 정충의 윤남근을 꺾고 2승을 챙겼다. 이들은 모두 토끼과인데 고라니가 토끼를 사냥한 것이라 해두자. 그리고 1회전에서 같은 치과의사 후배인 임명규를 이긴 김종화 대회장이 역시 2승을 거두었다(2승째는 좀 불투명).
둘 다 2승? 그런데 다음 김종화와 최병덕이 맞붙었다.
4강에 우리 팀 선수가 두 명 올라가면 따로 따로 붙어서 결승서 둘이 만나기를 바라는 게 인지상정인데, 이분들은 한 명이라도 결승에 올라보자는 속셈을 드러낸다.
김종화 대회장 왈 “주최측은 시드도 주는데 대진 조작도 아닌데 좀 어때?”
최병덕 회장 왈 “둘 중에 하나라도 살아보자는 건데 모르는 척 넘어가라. 좀.”
▲'이런 날이 또 올까?' 각각 2승을 거둔 김종화 대회장과 최병덕 회장이 흐뭇하게 대진판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 진짜 철책이 열리고 숨을 곳도 마땅히 없는 약육강식의 초원 생태계가 발동하는 3라운드.
원래 초속기파였던 두 사람이 목전에 떡이 보이니 그 절친한 양반들도 양보하기 싫은가 보다. 1시간여를 싸운 끝에 최병덕 승.
서능욱은 윤명철에게, 3레벨 고라니 진종수는 만만찮은 2레벨 치타 노상호를 잡고, 역시 결승에 올랐다. 최홍윤도 소리 없이 계속 이기던 김형섭을 조용히 돌려보내며 3승.
3레벨 이하는 3레벨 이하와 만나게 했더니 결과가 최병덕 진종수 둘이 결승에 진출했고, 서능욱 최홍윤 서중휘 3명의 프로가 결승에 진출했다.
모양 참 우습다. 고라니 둘을 세워두고서 호랑이 사자 악어 3마리가 압박하는 형세란…
5명이니까 짝이 안 맞다. 가장 강한 1패자 안상범이 낙점되었다. 안상범은 이기면 준우승자로 격상된다. 혹시 3레벨 둘이서 만나는 게 아닐까? 그럼 사상 첫 3레벨 우승자가 탄생하는데... 별의별 상상을 다했다.
▲'다시 결승에 오를 수 있을까?' 전국 바둑협회장 중 1인자 최병덕은 최근 공식 대국에서 7연승을 달리고 있었다. 안상범과의 1집패가 천추의 한을 남겼다.
상상대로 되지는 않았다. 1패 최강 안상범과 최병덕, 서능욱과 진종수, 그리고 최홍윤과 서중휘 대진이었다. 볼 만한 경기는 최홍윤-서중휘 대결이었지만 실제로 안성범-최병덕 전의 티켓파워가 대단했다.
최병덕은 미추홀기우회장이 되고 나서부터 미추홀에 출전했으니 대략 한 50차례 참가했다. 50번 출전에 3승조차 지난 대회에 한 번 차지했을 뿐. 그런데 이번엔 결승 진출이다. 주최 측의 농간도 있었고 밀어주기 땡겨주기도 있었지만 어쨌든 결승 진출이다.
더욱이 안상범이면 인천에서 바둑을 배우고 공부하여 입단 후보군. 자신은 이겨도 우승할 수도 없으니, 뭐, 준우승하자고 이 노병의 승점 쌓기를 방해한다는 것인가. 찐기자면 감히 최병덕 회장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후환이 너무 두려워서.
“(안)상범아 많이 줄었구나. 계가가 그리 부정확하냐. 과거엔 1집 딱 져주고 그러더니, 지려고 했는데 계가에 오산이 생겨서 이겨버렸구나.”
최회장은 다 이겨있는 바둑을 1집을 패한 것이다.
▲서부길과 최병덕. 두 사람의 얼굴에 진한 애석함이 묻어 난다. 뒤는 윤명철 부천협회장.
옆에서 기보를 찍어주던 인간골락시 서부길 사범이 안타까워한다. ‘아니, 회장님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수없이 있었는데요. 딱 안되는 한 길로만 찾아가셨네요.’
복덩방 아저씨같이 온화한 최병덕 회장도 몹시 아쉬운 듯 “아, 이것만 뻗었어도 많이 좋았는데....”
‘아니,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옵니까?’
‘이기려면 만방으로 이기지 1집이 뭐냐?’
여기저기서 에코가 듬뿍 들어간 음향이 들려온다.
50번 경기 출전 만에 처음으로 결승전을 두어 봤단다. 그럼 이 절호의 우승 기회를 또 가지려면 5년 후 쯤?
그러고 보니 미추홀 우승은 세계 최고의 난이도임이 분명 하다.
▲흑X를 허용하고 대신 흑1,3으로 백O를 다 취하는 멋진 작전을 펼친 최병덕. 이때만 해도 흑이 20집을 이겨있었다.
삼류 칼잡이 무협영화를 다시 돌리자. 주인공과 악당의 조우는 아쉽게도 몇 차례 실패하지만, 결국엔 그들은 만날 수밖에 없으며, 결국엔 그 악당들은 주인공의 손에 처단 당하는 스토리로 귀결된다.
그러게 5년이 걸려 잡은 기회를 놓쳤지만, 앞으로 5년 내 또다시 기회가 오면 잡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고 또 오늘을 살아가면 될 터.
오늘 최병덕 회장의 선전은 많은 고라니들에게 또 커다란 희망 고문을 선사한 쾌거였다.
▲늘 미추홀을 챙겨주시던 곽계순 여사가 (즐거운 투로) 유럽 여행 중입니다. 멀리서 미추홀 소식을 가장 먼저 기다릴 거에요~. 김종화 대회장의 잘 묵고 잘 살자는 요지의 대회사에 이어 곧장 경기에 돌입한다.
▲나종훈-김형섭(승).
▲권영기-노상호(승).
▲정충의-박미라.
▲하승철 진종수.
▲정대상-안상범(승).
▲절친 선후배끼리. 장혁구-하승철(승).
▲2005년 국무총리배 기념 부채를 들고 온 서부길. 20년 동안 쓴 부채 치고는 깨끗하다.
▲윤명철-서능욱(승).
▲최홍윤(승)-김형섭.
▲서중휘(승)-장우진.
▲노상호-진종수(승).
▲장우진(승)-나종훈.
▲1승을 향하여! 임명규-김미애(승).
▲'결승 진출을 놓고서~!' 최병덕(승)-김종화.
▲결승 서능욱(승)-진종수.
▲최진복(승)-한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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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 서중휘(승)-최홍윤.
▲서중휘(살 빠지니 넘 미남).
▲최병덕.
▲김종화.
▲박미라.
▲윤명철.
▲윤천준.
▲정대상.
▲박동주.
▲3승상 시상. 최병덕 김태세 윤남근 곽웅구 노상호 장우진 김형섭 김종화.
▲장두화 최홍윤 최병덕(시상 아님) 진종수 안상범 김종화.
▲우승 시상 최병덕 서능욱 서중휘 김종화.
▲커피카드 행운상. 최병덕, 도우미, 박미라, 김종화.
▲1만원권 행운상. 최병덕 윤명철 송양석 김종화 장두화.
▲2만원 행운대상. 최병덕. 장혁구 조성대 (찐기자) 김종화.
▲뜨거웠던 바둑열기를 식히며 술시가 되자 다들 갈비집으로 이동 중.
▲다들 술잔을 돌리며 기나긴 복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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