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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9-20 13:00:35
  • 수정 2022-09-20 13: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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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말 노사초를 만난다!' 이번 주말 경남 함양 고운체육관과 자곡면체육관에서 600여 기객들이 참가한 가운데 노사초배가 성대하기 치러진다. 사진은 3년만에 재개된 작년 노사초배 모습. 


※ 2021년 기자가 쓴 ‘노사초(盧史楚)의 생애’를 수정 보완하여 다시 싣습니다.



1975년생 이창호보다 꼭 100년 앞섰다. 1875년 경남 함양군에서 태어났고 광복을 맞은 1945년 생을 마감했다. 노사초(盧史楚)의 본명은 석영이며 사초는 호. 


대일항쟁기였던 그때는 순장바둑시대였다. 순장바둑은 흑백 8개씩 도합 16개의 돌을 기본 치석으로 삼은 후 시작하는 순수 우리의 바둑이다. 당연히 포석은 생략되었고 필연적으로 수읽기에 바탕을 둔 전투력으로 승부했다. 한국바둑이 실전적인 힘 바둑인 이유는 이러한 순장바둑 DNA가 남아 있기 때문일 터. 


노사초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다. 청년기에 당대 일인자 백남규(白南圭)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바둑과 본격적인 인연을 쌓았다. 처음 백남규에게 사사할 때는 여섯 점 바둑이었으나 몇 해 지나지 않아 곧 맞수가 된다. 30세가 지나서 바둑에 일로매진하여 국수(國手)에 이르게 된다. 



▲사초(史楚) 노석영(1875~1945).


노사초도 당연히 전투형이며 큰 기술을 구사하는 큰 바둑이었다. 특히 노사초는 하수 다루는데 명수였다. 윤경문(尹敬文)에게 노사초가 정선으로 들어갔을 시절, 윤경문은 같은 하수를 다섯 점을 접는데 노사초는 여섯 점을 접고도 이겼다고 한다. 함양 노사초는 대구 채극문(蔡極文) 고령 윤경문(尹敬文)과 함께 영남삼걸(嶺南三傑)로 불렸다. 


1937년 제1회 전조선위기(圍碁)선수권대회에서 노사초는 7승2패의 성적으로 우승한다. 당시 참가 선수는 노사초를 위시하여 채극문 민중식 정규춘 윤주병 권병욱 유진하 이석홍 장규황 권재형 등 내로라하는 조선의 국수 10걸이었다. 특히 20년 연하였던 유진하 이석홍은 노사초의 제자들이었으며, 당시 62세로 이미 정점에서 한참 지난 시기였음에도 노사초의 기재는 주머니 속 송곳이었다.


노사초는 과감한 사석작전에 능통했고 바꿔치기를 이용한 형세판단이 탁월한 고수였다. 바꿔치기에는 패싸움이 의당 따라붙는 법이며, 패싸움을 능수능란하게 해냈다는 뜻에서 ‘노패(盧覇)’, ‘노상패(盧上覇)’로 불렸다. 바꿔치기, 패싸움, 형세판단은 우칭위엔(吳淸原)의 특장점이기도 한데, 역시 동서고금의 고수들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판단이 우월한 법이다.


▲ 경남 함양 개평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앞산에 2008년 노사초공원을 조성해 노사초사적비를 세웠고, 그해 노사초배가 탄생하게 된다.


노사초가 순장바둑의 대가라고 해서 현대바둑에는 문외한일 거라는 오해는 거두어야 한다. 노사초가 활약하던 시기는 근대와 현대의 경계였다. 노사초는 시대의 흐름을 깨닫고 일본에서 들어온 현대바둑을 오히려 앞장서서 받아들인 인물이다. 


앞서 제1회 전조선위기선수권이 있었던 1937년 말 한국기원의 전신 경성기원에서는 전래의 순장바둑 폐지를 결의하고 일본바둑을 공식 채택한 원년이기도 했다. 노사초를 위시한 '기득권자' 노(老)국수들도 시대의 흐름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새로운 바둑에 적응할 준비를 했다. 결국 바둑은 같은 것이니까.


▲ 노사초(흑)-권병욱 대국기보. 1939년 12월, 경성(京城). 121수 이하 줄임, 흑 불계승.


1934년 중국방문을 마치고 조선에 들른 기타니미노루(木谷實)를 만나기 위해 조선의 고수들이 문전성시였다. 당시 여자프로 혼다가즈코(本田壽子)와 맞붙은 노사초는 조선의 대표로서 혼다에게 백을 들고 일본식 바둑으로 만방으로 이겼다. 프로가 없던 시절 '촌로 노사초'가 세련된 일본 프로를 향해 거둔 쾌거였다. 


노사초는 기다니로부터 당장 일본을 가더라도 3단 실력을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천재 우칭위엔(吳淸源)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받은 단위가 3단이다. 


둘째 아들이 일본유학 중 결혼을 하게 되어 한 달간 일본여행을 다녀온 노사초는 일본에서 대활약 중이던 천재소년 우칭위엔 만나보고서 “이슬만 먹었는지 기린처럼 미끈하고 맑아서 물욕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인물평을 남기기도.


▲ 노사초 생가를 지켰던 노사초 국수의 맏며느리 이정호(당시 92세, 2016년 작고) 여사와 손녀 노말해 씨. 공교롭게 기자가 2015년 촬영한 이 사진이 이여사의 마지막 생전 모습으로 남았다. 


노사초는 약관의 나이로 진사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마당에 더 이상의 대과출사(大科出使)를 포기함으로써 전도유망한 벼슬길을 접는다. 대신 바둑을 벗 삼아 전국을 유랑하며 인생의 낙을 삼게 된다. 


해산한 며느리의 약을 구하러 나섰다가 한양으로 내기바둑 길을 나서는 등 방랑기질이 다분했다.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며 내기바둑에 심취하여 지금 돈으로 20억쯤 되는 기와집 15채를 날렸고 20채를 되찾아왔다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덕분에 자택 등기도 27번이나 바뀌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부잣집에 태어난 노사초의 성품은 온화하고 검소하고 물욕이 없었고 항상 주변에 베풀기를 좋아했다.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자신의 옷과 바꿔 입기도 했다. 


집안은 증조부 노광두(盧光斗)가 호조참판을 지냈을 정도로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노광두는 흉년이 든 해엔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하게 해주도록 상소를 올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었다. 


참고로 함양 개평리 소재 ‘노사초 생가’로 알려진 문화재 자료 360호 ‘노참판댁 고가(古家)’는 풍천 노씨 가문의 노석규(盧錫奎)가 개평마을로 이주하였을 때에 지은 것으로, 노석규는 노광두의 부친이다.


당연히 노사초에게도 함양선비의 강직함은 있었다. 선친의 가산을 정리하여 10만 냥을 국난극복자금으로 헌납하기도 했으니. 요즘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가문이었다.  


노사초는 하수와도 격의 없이 잘 어울렸고, 내기로 딴 돈을 가난한 지인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일찍이 스승 백남규가 개성 박정현(朴正鉉)에게 내기바둑으로 큰돈을 잃자 박정현을 찾아가 바둑으로 잃었던 돈을 바둑으로 찾아주기도 했던 그였다.


▲ 이여사의 별세 후 노사초의 장손 노철환 씨 내외가 노사초 생가에 기거한다.


노사초 정신은 청심과욕(淸心寡慾)이다. 바둑 잘 두는 비결은 늘 깨끗한 맘으로부터 출발하며 맘이 깨끗하지 못하면 최선의 수를 찾지 못한다고 갈파했다. 위기십결(圍棋十訣) 가운데 부득탐승(不得貪勝)와 흡사한 덕목이라고 하겠다. 


말년에 후배 국수였던 유진하(柳鎭河)가 “사초선생께서는 타개하시면 바둑을 두고 싶어서 어찌하렵니까?” 묻자, “천국은 기선(棋仙)이 있는 곳. 어찌 그런 걱정을 하겠는가. 훗날 사람들이 나를 묻거든 일러주게. 固一世之善棋더니 而今安在哉야(진실로 한 시대의 잘 두는 바둑이더니 지금은 어디로 갔느냐)라고 말일세.”라며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구절을 자주 인용했다고 한다. 


1945년 봄 노사초배 타계했을 때, 그 구절을 만장(挽章)으로 크게 써서 상여 뒤에 걸었다고 한다.


불세출의 천재기사 이창호도 스승 조훈현을 만나기에 가능했고, 천하의 조훈현도 근대바둑의 개척자 조남철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조남철의 그 위대함도 구한말 노국수(老國手)로부터 잉태되었음에, 노국수의 최고봉 노사초(盧史楚)는 가히 한국바둑 현대와 근대의 가교였다.


경남 함양군은 노사초 선생의 이 같은 바둑계에 끼친 큰 공로를 기려서 생가가 있는 지곡면 개평마을에 2008년 8월 기념비와 정자를 세웠으며 선생의 생가 ‘노참판댁’은 경남 문화제 사료 제360호로 지정되었다. 


가을하늘 드높은 주말-.


100년을 세월을 넘어 노사초(盧史楚)를 만나러 600여 후예들이 함양으로 집결한다.


※ 기사 말미에 최강부 출전자 명단 있음.





오픈최강부(127명)

류승민 김다빈 임지혁 신현석 김상원 최서비 백운기 정찬호 박정헌 최경서 고유준 정승영 서지산 이은수 임지호 유리우 박정웅 정우진 박승현 김준영 송민혁 장시원 박해든 김정현 장이준 도종원 양종찬 서윤서 김여연 박도현 박인서 임의현 이주환 김사우 이상빈 홍세영 조성호 홍명세 이신우 박현성 김지성 박청호 조성빈 신동현 유신성 신유민 윤서원 윤서율 조성재 김민조 최환영 이승규 박정현 이민석 강경현 황환희 김하윤 김근태 윤진서 김기언 김상우 조상연 한주영 김대의 김동한 박종욱 김용완 김정훈 최윤상 강현재 김기백 강유승 안용호 박금서 온승훈 문정혁 김승구(아마 77명)


이재성 강훈 정훈현 오승민 박동주 홍석민 김성재 이승민 서준우 조남균 백찬희 김지명 김창훈 윤민중 강지훈 박수창 황진형 한태희 조완규 위태웅 최원진 임진욱 유오성 양민석 김주형 정서준 김유찬 차주혜 최민서 김윤태 주치홍 박병규 윤성식 강병권 김민석박정수 한웅규 이원도 최정관 고윤서 이나경 조종신 김민서 김상천 곽원근 김동우 최홍윤 김누리 김원빈 권효진(프로 50명)


아마최강부(28명)
최준민 김성기 이주영 남건우 김지태 안상범 장명훈 이준수 심해솔 오형석 최찬규 송홍석 박재동 박지수 주우주 김혁준 홍준선 류인수김신유 성준호 임지섭 이준호 하기락 이건형 김우리 양동일 김진우 조명원


시니어여성최강부(63명)
김철곤 채현기 정지우 서부길 최진복 이용우 이용만 김민지 이성재 이남경 심우섭 서수경 임지우 악지우 이서영 백여정 김희중 한상복 김지수 이서영 박성윤 이정은 임채린 이나현 김수아 오슬기 배정윤 안재성 이철주 장진아 김완호 김대환 이학용 박예원 김현숙 박용제 노상호 최호철 한지원 임솔 권가양 김성은 송연제 김수영 이루비 이재철 박성균 최지윤 강민아 김민주 최민서 이윤 윤라은 이우주 조은진 조시연 조민수 심지윤 양창연 이주열 박영렬 하성봉 이일호(여성 38명)




※ 이 기사는 현장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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